2014년 4월 16일 잊을 수 없는 그 날의 사고과정과 구조과정, 그리고 희생자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기억과 망각, 우리는 망각과 싸우고 있습니다.
잊지 않고 행동하기 위해서는 기억해야 하며, 기억을 보존해야 하고, 기억을 다른 사람과 나누어야 합니다.
살펴보시고 그날의 기억을, 304명 희생자의 삶을 기억해 주세요.

고하영 – 단원고 2학년 9반

하영이는
두명의 오빠가 있는 삼남매의 막내입니다.
맞벌이 하는 부모님이 출근하고 두오빠가 등교하면

 

스스로 거실시계를 보고 유치원차 시간에 맞춰 유치원에 다닐 정도로 당차고 똘똘했습니다.

 

하영이는 친구들과
“비슷한 나이에 결혼해서 비슷하게 아이를 낳고 아이들을 친구 맺어주자”고 약속했습니다.

 

중2때는 밴드 보컬을 맡아 전교생앞에서 마골피의 (비행소녀)를 부를 만큼 노래도 잘하고
친구들의 고민상담을 들어주는 언니같은 친구였습니다.

 

“보고싶은 하영아 엄마. 아빠는 이런 꿈을 꾼다.우리가 나중에 늙어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면
우리 딸은 17살의 예쁜 모습 그대로겠지 우리 곁을 떠난 날 그모습 그대로 우리를 반겨 주겠지…”

 

하영이는
책읽기를 좋아했고 공부도 잘했 습니다.
엄마는 딸이 늘 앉아서 공부했던 책상 만큼은 아직 치우지 못했습니다.

 

하영이의 꿈은
국어를 좋아해 국어선생님이 되는 것이였습니다.

 

또한 모든 딸이 그렇듯 엄마에게는 친구같은 존재였구요..

 

하영이를 기억하는 1학년 담임선생님의 기억속 하영이는 어떤 모습일까요.

 

“꽃같이 어여쁘고 노~랑나비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웠던 아이, 또래보다 성숙한 인격.

 

앞에서 끌고가는 리더쉽, 조용히 뒤에서 챙기는 배려심까지…

 

정말 보기 드문 훌륭한 학생이였습니다.

 

학급의 크고 작은 모든 일에 하영이 모습은 때론 언니같기도 하고 , 엄마의 모습 같기도 했습니다.
8과목중 7과목이 1등급, 수리과학탐구 발표대회 최우수상,
그ㅡ어렵다는 봉사상까지…
지상에서도 너무 아까웠던 하영이”
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영이는
15일 저녁 “아직 배가 출발하지 않고 있다”며 엄마와 통화한게 마지막 목소리였습니다.
수하여행을 다녀오면 친구들과 함께 반지 맞추자며 반지에 새겨넣을 문구를 뒤로한채

 

하영이와 친구들은 수학여행에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We alway exist around you”
(우리는 항상 너의 주변에 있다)

 

4월25일 가족품에 돌아온 뒤 29일에 장례를 치렀는데 그날은 하영이 생일이였습니다.
생일과 기일이 한날이 되어버린 하영이는 친구들과 함께 안산하늘공원에 잠들어 있습니다.

권민경 – 단원고 2학년 9반

민경이는
두 살 어린 남동생이 있는 남매중에 맏이 입니다.
초등학교때 부모님의 별거로 남동생과 엄마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동생도 잘 보살피고 엄마에게는 늘 슬거운 아이였습니다.
자신과 동생을 위해 헌신하는 엄마가 늘 행복하기를 바랬고 엄마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는 민경이었습니다.

 

민경이의 꿈은
간호학과에 진학하여 간호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가끔은 십대 소녀처럼 생각에 잠기며 자신의 생각을 메모로 남기기도 했습니다.
힘이 들고 지칠때면 구름 띤 맑은 하늘을 올려다봐. 잠시라도 고요해 질태니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지 말자.
다른땐 이때를 그리워할 날이 올테니.
어차피 이루워질 수 없어. 아니 어차피란 말은 빼자. 내가 가능하게 만들면 돼.
안되는 건 없으니까.! 피곤하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데 이 악물면 다 되는것 같아. 난 할 수 있다.

 

2014년을 맞으며 민경이는 버킷리스트를 작성했습니다.
착한 엄마를 따라서 기부하기는 꼭!
자원봉사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다른나라가서도 꼭!
엄마랑 심야영화보기

 

To 우리엄마.
편지 쓰려니까 또 눈물 나온다.
엄마 내가 미안해 전부다.
엄마 힘든거 알면서도 내 성격 못이겨서….
내가 울 엄마 닮아 쎈가봐.
엄마 염치없지만 다음생에도 우리 엄마 해라!
엄마가 아무리 튕겨도 난 엄마가 너무 좋은데 ♡ 매일매일 보고 싶고 사랑한다고 ♡
난 엄마 편이야 사랑해 !

 

민경이는
친구들의 질투심을
유발시킬 정도로 너무 예쁘고,
또래 아이들 처럼 연예인도 좋아하고
장난기도 많았지만 때론 친구들의 고민도 들어주는 든든한 아이였습니다.

 

“이렇게 예쁜 내친구를…..

 

인터넷에서 보니까 너희들은 아직 피지않는 꽃에 비유하는데
더럽고 때묻은 세상에 안보내기 위해 하나님이 먼저 부르신거라고……

 

민경아 그곳에서 행복해야해,
살찔 걱정없이, 밥은 많이 먹고
좋아하는 가수나 취미 같은 것도 맘껏하고!
진짜로 더 즐겁고 Happy한 날만 계속돼야되….
9반 1분단 2번째
권민경 영원히 기억할께
—너를 기억하는 친구—-

 

그리운 민경아!
어느덧 널 보낸지도 1년,
세월은 흘러가도 영원히 내 마음속에
살아있고,,
네가 너무 보고 싶구 그립다,
이쁜 너의 모습,
너의 목소리,
너무너무 그립다.
뽀뽀도 잘해주었는데
이제는 마음속에만 존재하겠지…
넌 영원히 이 가슴속에 살아서 존재한다.
—한 없이 무능한 아빠가—

 

민경이는
2015년도 생일에는 친구와 엄마와 함께 반지를 맞춰끼자는 계획이였지만 세월호와 함께 침몰하였고 3년여가 흘러 다시 생일이 다가왔지만 그약속은 지킬 수 없는 약속이 되어버렸습니다.

김민정 – 단원고 2학년 9반

아빠를 일찍 여의고 엄마와 단둘이 친구처럼 서로 의지하며 살아오던 민정이…
또래 아이들처럼 사춘기도 겪지 않고 너무 일찍 철이 들어 버렸답니다.
민정이의 꿈은 엄마처럼 몸이 쑤시고 아프신분들을 치료해주는 한의사가 되는 것이였습니다.

 

민정이가 남긴 편지내용을 옮깁니다.
♤2012년 5월 7일 엄마께, 사랑해요 엄마.
어버이날이네요
난 어린이 날에 친구들이랑 재미있게 놀았는데
엄마도 어버이날에 행복했으면 좋겠어,
갈수록 사고 싶은 것도 많고, 사야될것도 많아져서 엄마한테 부담만 늘리는것 같아서 엄마한테 미안해,
16년동안 나 무탈하게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잘 키워줘서 고마워.
앞으로 엄마한테 잘할께.
엄마가 요즘 여기저기 많이 아픈것 같아서 너무 속상해. 그런 모습 볼때마다 내가 빨리 한의사가 되서 엄마를 편하게 해주고 싶어.
엄마, 어버이날 축하하고 많이 사랑해.
앞으로 엄마 한테도 나 한테도 좋은 일만 일어났으면 좋겠다.
엄마 딸 민정올림 ♡

 

잘있니? 사랑하는 후배들아~!
너희 생각에 잠못 이루고 발을 구르며 허무히 시간을 보낸지 어느덧 일년이란다,
바뀐건 숫자뿐이 아니라…
너희를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하는 우리의 마음 또한 커져간다.
보고 싶고, 따뜻하게 안아주고,
같이 교정을 걷고싶다.

 

하늘로 가신 아빠를 그리워하던 민정이는 엄마에게는 가장 소중한 보석이였고 세상의 전부였습니다.
그런 민정이가 꿈꾸었던 세상은 밝고 맑고 누구나 행복한 세상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에 이어 하나뿐인 딸 마져 보내버린 엄마는 아직 민정이를 우리에게 내어놓지 못하고 있나봅니다.
민정이가 하늘나라에서 아빠와 행복하기를 기원합니다.
그래서
더욱 아리고 더 많이 축하를 합니다.
또한,
민정이가 꿈꾸었던 세상과 미래를 하늘에서는 꼭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민정이는 평택서호추모공원에 잠들어 있습니다.

김아라 – 단원고 2학년 9반

“slow and stead win the race” 아라 책상위에 쓰여진 문구입니다.

 

아라의 꿈은 약사가 되는 것입니다.
“황금손” 아라가 초등학교때부터 책상에 써 붙인 글입니다.
아픈 사람을 낫게 해주는 “황금손”이 되겠다고 늘 말했다고 합니다.
아라는 학원을 거의 다니지 않았지만 공부를 잘했습니다.

 

특히 과학과 영어를 잘했습니다.
중학교때부터는 영어 웅변대회에 나가 상도 많이 탔습니다.

 

아라는 세월호 참사 6일 만인 4월22일 가족의 품에 돌아와 지금은 평택 서호추모공원에 친구들과 잠들어 있습니다.

 

부모님께 세상 보물 1호였던 아라였습니다.
아빠는 쉬는 날이면 김치 된장찌개, 짜장면, 짬뽕, 탕수육, 낚지볶음, 잡채밥까지 아라가 좋아하는 음식은 다 만들어 줄 정도로 아빠의 모든 것 이었습니다.
아라가 숙녀가 되어 짝을 만나게 되면
“내 딸 잘 부탁하네” 하며
술 한잔 권하려고 담가 놓았던 10년이 넘은 인삼주는 이젠 주인을 잃어 버렸다고 하십니다.

 

버스운전을 하고 퇴근하고 돌아 온 아빠에게

 

“아빠, 힘들어서 어떻게. 아빠가 고생하는 거 나 다 알아. 이담에 내가 아빠 호강시켜 줄 때까지 건강해야 돼”
약속했던 아라는 지금 아빠곁에 없습니다.

 

“미안하다.
꼭 너의 억울함을 풀어줄게.
끝까지 끈질기게 싸울게.
잠시 하늘 나라에서 천사로 있다가 다시 내 딸로 태어나서 못 받은 사랑 더 많이 받아야지…” 아빠.

김초예 – 단원고 2학년 9반

초예야! 초예야!
“우리 큰딸” 하면 “응, 왜? 엄마, 아빠” 이렇게 대꾸해주던 딸의 목소리를 이제는 들을 수가 없구나.
엄마, 아빠가 힘든 것 같으면 우리 큰딸이 “엄마, 아빠 사랑해” 하고 안아 줬는데,
이제는 아무리 불러도 우리 딸이 보이지 않는구나.”

 

“쵸쵸”
초예는 여동생 둘에게는 엄마같은 존재였습니다.
맞벌이로 바쁜 아빠 엄마를 대신해 동생들의 식사와 간식을 꼬박꼬박 챙겼고 공부도 가르쳤습니다.
엄마에게는 친구같은 존재였다고 합니다.
함께 장을 보러 다녔고, 엄마와 함께 산책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초예는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는 몸이 많이 허약했다고 합니다.
낯을 좀 가리는 편이었지만 친해지기만 하면 장난도 잘 치는 밝은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초예의 꿈은
어릴적부터 발달장애아를 돌보는 일을 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습니다.
크면서는 “취업이 잘된다”며 꿈을 간호사로 정했습니다.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난 4월 15일밤,
“일찍 잔다” 며 엄마와 전화 통화 한 것이 마지막 인사가 됐습니다.

 

초예는 세월호 사고가 난지 10일째였던 4월 25일 엄마의 품으로 돌아왔고
지금은 경기도 화성 효원추모공원에 친구들과 함께 잠들어 있습니다.

김해화 – 단원고 2학년 9반

“지금 자면 꿈을 꾸지만 깨어 있으면 꿈을 이룬다”
해화의 좌우명입니다.
해화는 단원고에 입학하며 “나의 로드맵”을 작성합니다.

 

1단계 : 18세 영수 모의고사 1등급 받는다.
2단계 : 2016년 20세 경희대 한의대에 장학생으로 입학한다.
3단계 : 2026년 30세 경희의료원에 한의사로 들어간다.
최종 : 경희의료원에 한의학 최고 교수가 되고 의료원장이 된다.
이같은 야무진 목표를 세웠던 해화는 여동생이 하나 있는 자매중에 맏이입니다.

 

“제주도 수학여행 갔다 와서 선물로 한라산 초콜릿 사다 줄 사람 많기도 하다”면서 여행짐을 꾸리던 해화.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을 모두 쫑알 대면서 “엄마한테 다 이야기해야만 공부를 시작할 수 있다”며
엄마의 친구가 되어주고 때론 보호자 역할도 해주고 엄마의 생일날에는 미역국을 끓이고
집안에 풍선을 주렁주렁 매달고 계란찜에 “오천반상”을 차려냈던 해화는 엄마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학교에선
“통솔력도 있고 모든 것을 열심히 하려는 똑부러진 아이였습니다.
해화는 예쁘고 자상한 한의사가 되는 것이 꿈이였습니다.
엄마와 함께 다니던 교회에서는 유치부 보조교사로, 드럼, 피아노등 악기도 잘 다뤘고
밝고 명랑한 성격답게 어릴적부터 친구도 많았습니다.
해화가 떠난 지금은 친구들이 엄마에게 해화를 대신해 안부전화를 한다 합니다.
4월25일 엄마품에 안긴 해화는 서호추모공원에 잠들어 있습니다.

김혜선 – 단원고 2학년 9반

“그리운 딸 혜선아!
잘 지내고 있지?
어제밤 꿈에
힘든 너의 모습 마음이 아팠어
수능이 다가와서
너의 마음이 힘든게 아닐까 생각하고 싶어.
세상의 고통일랑 다 잊고
친구들과 행복한 하루하루가 되길 바래.

 

ㅡ 영원한 내사랑 혜선 ㅡ

 

혜선이는 천성이 밝은 혜선이는 늘 활기차고 애교 넘치는 막내였습니다.

 

혜선이의 꿈은 시각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여력이 되지 않는다고 반대를 했다고 합니다.
고민하던 혜선이는 대신에 다른 꿈을 찾았습니다.
부산에 있는 해양대학교에 입학하여 배를 만드는 조선공이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시각디자이너의 꿈도 포기하지 않으면서 할수 있는 분야가 있다며 좋아 했습니다.
이처럼 혜선이는 늘 엄마의 뜻을 잘 따르고 엄마를 배려해주던 착한 아이였습니다.

 

또한 혜선이는 또래의 평범한 아이들과 달리 크리스마스 날 친구들과 밖에 나가 놀지 않았습니다.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함께 보내야 한다”며 엄마와 함께 놀았다고 합니다.
아빠의 생일날에는 직접 케이크를 만들어주기도 했습니다.
가끔은 엄마가 힘들다며 교복도 직접 빨아 입기도 했던 혜선이는 늘 활기차고 자신감 넘치는 성격에
엄마에게는 친구같은 딸이자 엄마의 보물 2호라고 언제나 입버릇 처럼 이야기 하곤 했다합니다.
이렇듯 막내 혜선이는 엄마와는 친구얘기부터 때론 엄마의 고민상담도 해주고
엄마를 같은 여자로 이해해주는 진짜 친구같은 딸이 되었답니다.
혜선이와 엄마는 서로에게 영원한 내 편이었습니다.

 

부모님은 길을 걷다 교복을 입은 여학생만 봐도 혜선이 생각에 눈물이 흐르고 재잘거리며 서너명씩 같이 다니는 학생들만 봐도
“내 딸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에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고합니다.
이는 세월호 참사로 사랑하는 아이들을 잃은 모든 부모님들의 공통 된 아픔이자 긴 고통이며 결코 끝나지 않을 상처입니다.

 

불우 이웃돕기 모금통을 보면 꼭 돈을 넣고 지나가고 청소하시는분을 도와 같이 청소를 하고 오던 아이.
친구들 열댓 명한테 춤 연습을 시키면서 수십번을 틀려도 몇시간 동안 짜증 한 번을 안내던 아이.
생일이면 가게를 차려도 될 만큼 과자 박스, 과일 상자, 케이크며 선물이 넘치도록 받아 오던 아이.
김 ᆞ 혜 ᆞ 선

 

배를 만들고 싶던 아이 혜선이는 아마도 세월호에 오르자마자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구석구석을 다녔을 것입니다.
조선공이 되어 배에 탄 자신을 상상하며 누구보다 행복해했을 혜선이를 상상해 봅니다.

 

혜선이는 지금 평택서호추모공원에 잠들어 있습니다.

박예지 – 단원고 2학년 9반

예지는 여섯 살 아래 남동생이 있는 맏이 입니다.
예지는 힘들게 일하시는 엄마 아빠를 늘 먼저 생각하는 효녀였습니다.
부모님이 바쁘시면 예지가 남동생한테 밥을 차려주고 엄마아빠 걱정하지 마시라고 밥차린 사진을 찍어서 보내드리곤 했습니다.

 

단 한번도 비싼 물건을 사달라고 조른적도 없었고 메이커나 브랜드에 관심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새뱃돈을 모아서 아빠한테 중고차를 사드린적이 있을 정도로 알뜰한 아이였습니다.
또 자기 용돈을 모아 외할머니 생신때는 영양크림을 사드리기도 했습니다.
예지 할머니는 예지가 사준 영양크림을 써보지도 못하고 그저 아껴두시고 보고 우신다고 합니다.

 

예지의 꿈은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지는 미쳐 꿈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세월호와 함께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예지는 4월 24일에 뭍으로 나와 부모님과 할머니의 품에 안겼습니다.
예지는 경기도 평택서호추모공원에 잠들어 있습니다.

배향매 – 단원고 2학년 9반

향매는
1997년 7월 1일 중국 안산시 천산구 송삼태자향 이태자촌 한산부인과에서 태어났습니다.
조상님이 한국분이신 향매부모님은 중국정부가 소수민족에 한 해 두자녀를 낳아도 되게끔 정책을 바꿔 12년만에 얻은, 언니와 열두살 차이가 나는 늦둥이 막내였습니다.
엄마의 배가 위낙 불러 쌍둥이 아닐까 의심도 했지만 몸무게 여덟근 칠량(4.4kg)의 우량아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어릴때부터 한국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으며 한번 듣기만 하면 “라랄라”곧 따라 불렀습니다.
부모님이 한국에 정착한이후 2011년 한국에 온 향매는 안산 다문화 거점학교인 관산중학교에 입학하여 한국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바웟돌을 올려놓아도 먹고 살”
“어디에 내버려 두어도 걱정 안되게 지절로 다해내는” 아빠의 바렘처럼 향매는 금방 친구들을 사귀며 무리없이 적응해냈습니다.
늘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공감할 줄 알고 꾸밈없이 늘 해맑게 웃는 아이였으며 일하는 부모님께는 효도할거라는 그런 아이였습니다.

 

향매의 꿈은
커가면서 조금씩 변화를 보였습니다만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는 향료를 만드는 조향사를 꿈꾸었습니다.

 

2014년 4월 16일,
단원고 수학여행단을 실은 세월호가 진도앞 바다 맹골수도에 침몰하는 비극적인 참사가 벌어집니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

 

어른의 말을 믿었던 착한단원고 학생들…
그러나
향매포함 250명의 친구들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향매는 열흘후인 4월 25일에야 가족의 품에 돌아왔습니다.

 

2014년 설이 지난후 향매는 가족사진을 찍자며 가족을 안산 중앙동 이미지 사진관으로 불러내어 마지막이 된 가족사진을 찍었습니다.
사진속 향매는 좋아하는 노란색깔 개나리빛 스웨터를 입고 있었으며 좋아하는 까만 매니큐어를 바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열흘만에 돌아온 향매는 열 손가락에 멍이든 상태로 돌아왔습니다.

 

최혜정 담임선생님과 2학년 9반 친구들중에서 단 두명만이 살아 돌아왔습니다.
향매는 평택 서호추모공원에 잠들어 있습니다.

오경미 – 단원고 2학년 9반

오구 오구 오경미,
경미의 꿈은 건축가 였습니다.
엄마, 아빠에게 늘 “건축가가 돼서 돈 많이 벌어 집을 사주겠다”고 했습니다.
중학교때는 큐브맞추기에 빠져 살았다합니다.
초등학교 친구들과 밴드를 만들어 열심히 전자 기타를 치러 다니기도 했습니다.
단원고에 입학해서는 연극부 활동을 하는등 평소에는 얌전한 모범생이지만 동시에 하고싶은 것은 적극적으로 찾아서 하는 적극적 성격의 소녀였습니다.

 

중3때부터 교복바지를 즐겨입었고 단원고에 진학해서는 아예 치마 대신에 바지를 두 벌 맞춰 짧은 숏 컷에 바지를 입고 다녔습니다.
집에서는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일곱살 어린 여동생도 잘 들봤습니다.

 

경미는 세월호가 침몰하기 전이었던
4월16일 오전 6시 46분께 휴대전화로 배위에서 찍은 바다사진을 엄마에게 보냈습니다.
경미로부터 온 마지막 연락이였습니다.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1반 한고운과 경미는 초등학교 6학년때부터 단짝입니다.
이둘은 사고 일주일째인 4월 22일 나란히 부모님품에 돌아와 같은날 같은병원에서 장례를 치른후 지금은 경기도 평택서호추모공원에 같이 잠들어 있습니다

이보미 – 단원고 2학년 9반

길거리 무대에서 발탁되어 안산 YMCA 청소년 음악단체 활동도 했던 보미,
가끔은 뾰로롱한 표정으로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기도 했지안 가족들을 사랑하는 마음만은 살갑게 표현할 줄 알던 보미,
“헤에~”
쑥스러울 때도, 멋쩍을 때도 그리고 미안할 때도 짓던 미소가 트레이드마크인 보미였습니다.

 

보미는 꿈과 욕심이 많았습니다.
노래뿐만이 아니라 공부도 전교에서 손꼽을 정도로 잘했습니다.
마음도 착하고 따뜻했습니다.
강아지를 좋아했던 보미는 4년 전 어렵게 엄마의 허락을 얻어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다섯 살 많은 언니와 자기 이름의 돌림자를 따서 강아지 이름을 “이보들”로 지었을 정도였습니다.
보미는 보들이를 마치 자신의 동생처럼 돌보며 키웠고 “수의사의 꿈”도 보들이를 키우면서 갖게 됐다고 합니다.

 

보미는 세월호 참사 9일 만인 4월 25일 엄마의 품에 돌아왔습니다.
가족들이 자신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하기위해서 였는지 보미의 목에는 학생증이 걸려있었습니다.

 

2014년 7월 24일 서울시청앞 서울광장에서 열린 “세월호 100일 추모 시낭송음악회”에서 가수 김장훈씨가 뮤직비디오를 공개했습니다.
보미가 2014년 2월 단원고 졸업식에서 선배들을 위해 (거위의 꿈)을 부르는 모습이 담긴 동영상에
김장훈씨가 따로 녹음한 자신의 목소리를 더해 듀엣곡으로 만들었습니다.
김장훈씨는 무대위에서 뮤직비디오속의 보미와 함께 (거위의 꿈)을 불렀습니다.

 

9반 최혜정선생님의 교탁 바로 앞 짝꿍 임세희와 함께 자리한 보미는 지금 안산하늘공원에 친구들과 함께 잠들어 있습니다.

이수진 – 단원고 2학년 9반

이수진….
이 아이를 어떻게 여러분들께 소개를 할까요.
단원고를 찾아오는 분들께 9반에 들러 꼭 소개해드렸던 아이.
사진속의 천사같은 환한 반달미소로 반기는 아이…
“수진아~!”
부르면 금방이라도 뛰쳐 나올 듯한 아이…

 

수진이는
1997년 3월 6일 우렁찬 울음을 터뜨리며 엄마 아빠와 이세상과 만났습니다.
아기적 수진이는 잘 먹고 새곤 새곤 잘 잤지만 한편으론 무척 예민하고 까다롭기도 했다고 합니다.
인형같은 여동생과 아들이라 부를 만큼 아끼는 남동생이 태어나면서 솜사탕처럼 부드럽고 달콤한 수진이가 되었습니다.
엄마 아빠에게는 언제나 보석같은 맏이였고, 엄마와 쇼핑을 즐기고, 옷을 센스있게 골라주고, 고민을 함께 나누며 마음까지 코디해주는 엄마의 만능 코디네이터였습니다.
바쁘신 아빠에겐 늘 따뜻한 마음으로 응원하고 기다려주는 속 깊은 딸이기도 했구요..
엄마가 안계실때면 기꺼운 마음으로 아빠의 식사당번을 자처했고 동생과는 성격이나 취향이 달라서 자주 다투지만 언제나 모든 걸 함께 나누는 수자매 였습니다.

 

목 끝까지 단추를 채운 교복과 단정하게 묶는 머리가 잘 어울리는 수진이,
수진이의 어릴적 꿈은 수의사가 되는 것이였습니다.
하지만 환공포증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고심끝에 새로운 꿈을 찾았습니다.
세계를 돌며 지구촌 어려운 사람을 돕는 국제 구호전문가가 그것입니다.

 

글로벌 소녀 수진이는
한복을 좋아해서 학교에서는 “다도동아리”에서 활동했으며 또한 바른생활부(선도부)에서 활동했습니다.
이처럼 수진이는
미소가 예쁘고 친구들을 사랑했던 아이,
우리 주변에서 늘상 보는 천진난만하고 밝은 성격의 그런 아이였습니다.

이 사 (00중학교 2학년 5반 이수진)

 

아쉬움과 설레임이 교차하는 마음
태어나서 지금까지 자라온
나의 집
언제나 펀안하고 다정한
시골 할머니 마음처럼
우리 가족을 지켜주었다.

 

포근하고 따스하고 구름 속 같이
아늑한 곳

 

이제는
발걸음을 다른 곳으로
향해야 한다.

 

새 보금자리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듯
당당하게
우리 가족을 맞는다

 

수진이가 중학교 2학년때 쓴 시입니다.

 

“이제 새로운 곳으로 영원히 ‘이사’ 가 버렸구나. 구름속 같이 포근하고 아늑한 곳에서 편히 쉬어라”는
어머니 말씀을 기억해 주십시요.
택배로 돌아온 커리어를 끌어안고 통곡하시는 어머니의 눈물을 기억해 주십시요.

 

수진이는
사고후 38일만에 276번이라는 번호표를 달고 가족의 품에 돌아와 하늘공원에 친구들과 함께 잠들어 있습니다.

이한솔 – 단원고 2학년 9반

한솔이는

 

남동생이 하나 있는 남매중 맏딸입니다
한솔이는 맞벌이를 하시는 부모님을 대신해 남동생을 잘 챙겨주는 든든한 맏딸이었다고 합니다.
“딸바보”아빠는 “동생바보” 한솔이가 너무 예뻐서, 언제나 직접 한솔이 간식도 챙겨 주셨고 한솔이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사주셨습니다.

 

어머니가 한솔이를 보면서 “어떻게 내 배속에서 저런애가 나왔는지 모르겟다. 정말 기적같다”고 할 정도로 한솔이는 소중하고 착한 딸이었습니다.

 

한솔이의 꿈은
경희대 호텔조리학과에 진학하여 한솔이의 이름을 걸고 빵집은 하는 것이었습니다.
학교에서도 제과제빵동아리에서 활동했고 직접구운 쿠키와 케잌을 부모님생일에 내어놓기도 했습니다.

 

공부 할 땐 하고 놀 땐 놀 줄아는 똑부러진 성격의 한솔이는 노래와 춤도 잘춰 슈퍼스타k에 출전하여
예선을 통과하기도 했던 만능재주꾼 이었으며 먼저 다가가는 성격에 주변에 친구도 많았습니다.

 

수학여행을 떠나기 일주일전에 한솔이는 버스에서 내리다 다리를 삐끗하여 오른쪽 다리 인대를 다쳐서 깁스를 하고 수학여행을 떠났습니다.
세월호가 침몰할 때 한솔이가 다리 깁스 때문에 탈출을 못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한솔이 아버지는 너무 괴롭고 힘들다고 하십니다.

 

사고후 한솔이 친구들도 한솔이의 아픈 다리때문에 탈출을 걱정하는 친구들의 글을 쓰며 기도하였지만 끝내 한솔이는 탈출하지 못했습니다.
사고 소식을 듣고
“전날 수학여행을 잘 다녀오겠습니다 인사하고 떠났는데 이게 무슨일인지 모르겠다”고 하시던 어머니,
“타임캡슐도 만들고, 크리스마스에 명동가고, 경희대에 같이가자”고 친구들과 약속했던 한솔이.

 

맨날 걸을때 씽크홀에 빠지던 한솔이는 끝내 싸늘한 주검이 되어 친구들과 부모님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딸바보 아버지는 한솔이가 깁스 때문에 집에 벗어 두고간 오른쪽 신발 한짝을 가슴에 끌어 안고 펑펑 우셨습니다.

 

“맨날 늦더니 평소처럼 너 올 때까지 기다릴 테니까 얼굴 보여줘야돼 우리 뚱순이..”
친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한솔이는 보름이 지난 5월 1일에 돌아와 지금은 평택서호추모공원에 잠들어 있습니다.

임세희 – 단원고 2학년 9반

세희는
두 살 터울 남동생이 있는 남매중에 맏이입니다.
어린 세희는 울보였다고 합니다.
아빠가 눈을 마주치기라도 할려면, 엄마가 화장실을 가려해도 안거나 업어야 했을 정도 였다고 합니다.
이런 세희를 엄마는 “껌딱지”, 할머니는 “효녀” 라고 불렀답니다. 덕분에 엄마가 집안 대소사로 시댁에 내려갔을 때 세희 덕분에 물 한 방울 손에 대지 않았습니다.

 

세희는 고지식하고 내성적인 아이였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약속 시간은 지켜야 했습니다.
내성적인 성격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점핑클레이를 시작하였고 어버이날에는 카네이션과 꽃바구니를 만들어 부모님께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에는 점핑클레어 자격증을 따기도 했습니다.

 

또한
세희는 화장품과 미용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아빠의 흰 머리카락을 염색해 줬고.얼굴 팩도 붙여주곤 했답니다.

 

새희의 꿈은
화장품등에 향을 덧입히는 조향사가 되는 것이였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는 향수를 직접 만들어 보고 싶다고도 했습니다.
수학여행을 일주일 앞두고도 서울대에 가서 조향사 관련 강의를 듣고 왔습니다.

 

세희는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공부를 마치고 매일 밤 12시가 넘어서 돌아왔지만 맞벌이하는 엄마와 아빠를 도와 집안일도 마다하지 않는 효녀였습니다.
설거지하는 엄마를 뒤에서 껴안으며 “사랑한다”고 말하는 애교쟁이 이기도 했고, 또한 뭐 하나 사달라고 투정도 부리지 않았습니다.

 

세희는 4월15일 밤 엄마에게 “배가 출항한다:는 문자를 보냈는데 이게 딸로부터 온 마지막 연락이 되었습니다.
16일 아침 세월호가 침몰한다는 다급한 소식을 들은 엄마는 애타게 전화를 걸었지만 세희는 받지 못했습니다.
세희의 짝꿍은 거위의 꿈을 부른 이보미 입니다.
2분단 맨 앞자리 최혜정 선생님과 바로 마주하고 있습니다.

 

“아가씨, 엄마. 아빠 커피 한잔이요” 하면. “네~난 예쁜 딸이니까” 하면서 엄마 아빠 취향에 맞게 타주던 커피 한잔이 그립다.
딸님이 보고 싶고. 보고 싶어서 발길이 분향소로 향했는데. 갈 수가 없었어.
눈물이 멈추지 않아서 도중에 먼발치에서 보고만 오기를 수십 번. 미안해.”

 

진도체육관에 있는 엄마의 머리위를 찾아와 서너 차례 맴돌다 동트는 여명속으로 사라진 노란 나비가 찾아 온 날.
2014년 4월 25일 0시 11분, 신원 미상 169번으로 세희는 돌아왔습니다.
오후 3시에 DNA가 끝나고 한낮이 되도록 가족을 찾지 못하는 169번을 보고 “저 아이의 부모는 어째서 자식도 못 알아보고 그럴까”라고 생각했던 엄마,
그런데
그 아이가 세희라니….
엄마는 목 놓아 울었습니다.
“딸을 몰라봐서 미안하다 “울었고” 모습을 보여 주고 이렇게 만질 수 있어서 고맙다”고 또 울었습니다.

 

세희는 안산 하늘공원에 잠들어 있습니다

정다빈 – 단원고 2학년 9반

7월의 마지막날 생일을 맞은 다빈이는 다섯살 많은 언니가 있는 자매중에 막내입니다.
다빈이의 어릴적 꿈은 소설가였습니다.
부모님이 책을 많이 사줘서 자연스럽게 책을 좋아했고 친구들이 “책벌레”라는 별명을 붙여줄 정도로 책읽는 걸 좋아했습니다.

 

책을 한번 잡으먼 다 읽을 때까지 엄마가 아무리 불러도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밥을 먹으면서도 티브이를 보면서도 시험기간에도 교과서 앞에 소설책을 펼쳐 놓고 그걸 먼저 읽었습니다.
특히 판타지 소설을 즐겨읽었다고 합니다. 중학교때 부터는 직접 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로맨스와 판타지 그리고 최근엔 추리 소설까지 분야도 다양했습니다.

 

또래 아이들처럼 빅뱅을 좋아하고 (붉은 노을) (스틸얼라이브)등을 듣고 또 듣고..피아노와 기타연주도 잘했습니다.
피아노는 체르니 100번을 넘자 좋아하는 노래들을 직접 연주할 정도였습니다.
또한 종이학 종이 장미. 봉제 인형. 목도리, 팔찌. 비즈등 손으로 하는 것은 뭐든 잘했고 흥미도 남달라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제과제빵사가 되고 싶어했습니다.
빵을 만드는 동아리활동을 하면서 생긴 꿈입니다.
손재주가 좋아 빵을 잘 만들었고 동아리에서 만든 빵을 집에 가져와 가족들과 나눠 먹곤 했답니다.

 

학교에서는
성격이 늘 조용하고 여성스러운 면이 많았으며 온순하고 착해서 남을 잘 배려해서 주변에 친구들도 많았다합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따뜻한 마음을 소유한 다빈이가 있었기 때문에 주변이 평화로웠던 것 같다는
1학년때 담임선생님의 추억에서 다빈이의 따뜻한 성품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영상찍는 것도 좋아해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영상찍고 사진찍으며 회의하며 만든작품으로
교내 UCC대회에 출품하여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던 다재다능한 다빈이였습니다.
막내딸인 다빈이는 집에서도 주관이 뚜렸하고 온순한 아이로 맞벌이 하는 부모님을 대신해 집안일도 잘 도운 효녀였습니다.

 

세월호가 기울기 직전인 4월16일 오전7시10분경 엄마는 다빈이와 통화하면서 “맛있는거 많이 먹고 수학여행 잘 다녀와라”고 말했습니다.
그게 마지막 통화였습니다.
4월24일 가족의 품에 돌아온 다빈이는 지금 안산 하늘공원에 잠들어 있습니다.

정다혜 – 단원고 2학년 9반

슬픈생일식.
2015년 다혜의 생일에는 다혜를 “무조건 이뻐하던”아빠가 곁에 있었으나 지금 다혜아빠는 하늘나라 다혜곁에 있습니다.
대장암 수술을 받은 뒤 점점상태가 좋아지고 있었던 다혜아빠는 다혜를 잃은 뒤 암이 재발하였고 2015년 10월 사랑하는 다혜곁으로 떠나셨습니다.

 

다혜의 꿈은 치기공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평소 엄마는 건강하고 체격이 좋으니 경찰이나 군인을 하라고 말했지만 다혜는 혼자 몰래 다른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다혜의 꿈은 엄마가 다혜의 유류품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것입니다.

 

“가족은 다혜의 보물 1호”

 

다혜는 어릴적부터 여섯 살 많은 언니와 단짝처럼 지냈습니다.
고민이 생기면 늘 언니에게 먼저 털어 놓았고 언니는 아르바이트로 용돈이 생기면 늘 다혜에게 맛있는 것을 사주곤 했습니다.
나이 차이는 좀 있었지만, 엄마와 아빠가 맞벌이를 해 늘 집에서 단둘이 어울려 놓았고 그러다 보니 자매 사이도 좋았습니다.

 

다혜는 일을 하느라 힘든 엄마를 대신해 집에서 청소와 설거지, 빨래를 도맡았고 식당을 운영하다 늘 통통 부어 있는 엄마의 손을 주물러 주던 마음씨 고운 아이였습니다.
아빠가 투병중일때에는 아빠의 저녁식사를 꼭 챙겨주던 다혜였습니다.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자 다혜의 가족들은 진도로 내려가 다혜가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4월이 다 가도록 다혜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이러다 다혜를 영영 못 찾는 거 아니냐며 불안해했습니다.
하지만 언니는
“다혜는 반드시 내 생일이 지나기 전까지 돌아온다”고 했고 다혜는 거짓말처럼 언니의 생일날인 5월 4일 가족의 품에 돌아왔습니다.
다혜는 “다윤이” 라는 고양이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다윤이가 새끼 세마리를 출산하는 걸 직접 도우기도 했답니다.

 

다혜는
경기평택서호추모공원에 잠들어 있었지만 아빠곁인 안산 하늘공원으로 옮겨와 아빠곁에 있습니다.

조은정 – 단원고 2학년 9반

은정이는
한 살 터울 오빠가 있는 남매중에 믹내입니다.
은정이는 어릴때부터 눈물과 울음이 많은 아이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맑고 여린 감정 끝에 물러서지 않는 고집과 원칙 그리고 묵직한 힘을 품고 있었습니다.
눈물을 참지 못했지만 자신이 한번 옳다고 생각하면 물러서는 법이 없었습니다.

 

중학교때의 친구들과의 힘든 성장과정을 거쳐 은정은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버릴것과 꼭 지켜야할 것을 구분하며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고등학생이 된 후 은정은 더욱 밝아지고 넓어졌습니다.
길을 찾으며 행복은 가속도가 붙었고 화분의 꽃을 보면서 조차도 “사랑스럽다”는 말을 내뱉었습니다.

 

“효녀은정”
은정이 부모님의 휴대폰에 저장한 이름입니다.
은정이는 이처럼 “공주님”도 “예쁜딸”도 아닌 효녀이길 원했습니다.
“죤정” 은정이는 나이보다 어른 스러웠습니다.
부모님이 운영하던 식당이 문을 닫게 되자 부모님 몰레 담임선생님을 찾아가 가계곤란 장학금을 신청하기도 했으며 학원대신에 교회에서 운영하는 공부방을 찾았습니다.
스마트폰 대신에 구형PMP(휴대용 멀티미디어 플레이어)를 얻어와 인터넷강의를 들으며 공부했습니다.
학교 성적도 좋아 줄 곳 전교 10등안에 들었습니다.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날 커다란 박스에 과자를 잔뜩 넣고 있길래 ‘왠과자냐?’고 물었더니,
친구들과 나눠 먹을거라고 즐거워 했다”고 아버지께서는 기억합니다.
아버지꺼서는 다음날 일찍 일을 나서며 잠든 은정이의 손을 잡고 기도후 이마에 뽀뽀를 해줬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와 딸의 마지막 인사가 됐습니다.
은정이는 세월호 침몰때 친구를 구하기위해 객실로 돌아갔다 숨진 2반 양온유양과는 절친입니다.
다니는 교회는 달랐지만 중학교때부터 교회 공부방을 같이 다녔고 때론 예배도 같이 보곤 하였답니다.

 

은정이의 꿈은
약사가 되어 부모님을 돕는 것이였습니다.
자신이 나고 자란 안산처럼 대도시도 시골도 아닌곳에서 약국을 하며 살고 싶어했습니다.

 

“수능때 수학 1등급. 영어 1등급. 국어 1등급. 단원고 이과 전교 1등. 이화여대 약학과 합격. 후화하지 않을 만큼 정말 잘 볼것”
은정은
자신의 인생계획을 꼼꼼하게 적어 나갔습니다.

 

늘 주변을 밝게 하였던 은정이를 1학년 담임선생님을 맡으셨던 선생님께서는
*세상을 행복하게 살았고 또 세상을 행복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아이*였다고 기억합니다.
조회때마다 늘 반갑게 맞아주고 활기차고 밝은 목소리와 웃음이 예뻤던 은정이는 반아이들이
“성격미인”으로 이구동성으로 꼽을 만큼 친구들과의 관계도 좋았습니다.
친구들의 추천으로 선행상을 받기도 하였고 모든 대회에서 두각을 들어내며 많은 상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은정이의 책상과 의자에는 은정이가 공부하던 교과서와 참고서가 수북히 쌓여져 있습니다.
은정이의 손 때 묻은 참고서는 주인을 잃고 먼지가 쌓여갑니다.
은정이의 짝꿍은 권민경입니다.

 

성격미인 성실한 아이 똑똑한 아이 은정이는 안산 하늘공원에 절친 온유와 함께 잠들어 있습니다.

진윤희 – 단원고 2학년 9반

윤희는
의젓하고 마음이 따뜻한 아이였습니다.
맞벌이를 하는 엄마와 아빠의 속을 쎡인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늘 알아서 자기일을 했던윤희,

 

윤희의 꿈은
세무사나 회계사가 되고싶어 했습니다.
옷이나 신발을 사달라고 조른적도 없었다고 합니다.
집에서는 유난히 작은 입으로 조잘조잘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고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고 오는 길에
무거운 책가방을 엄마가 들어주려 해도, 엄마 힘들다고 한 번도 맡기지 않았던 착한 딸 이었습니다.

 

고생하는 엄마, 아빠 생각해서 운동화 한켤레로 바닥이 다 닳을 때까지 신으면서도 불평 한번 하지 않던 속 깊은 큰딸이기도 했습니다.
늘 낡은 운동화 한켤레만 신고 다녔기에
보다 못한 아빠가 새운동화를 사줬답니다.

 

윤희는 이 운동화를 신고 기쁜 마음으로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났습니다.
윤희는 세월호가 바닷속으로 사라진 지 6일 만인 4월 22일, 엄마 아빠 동생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윤희가 가져갔던 휴대전화와 가방등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아빠가 사준 새 운동화도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2016년 2월,
그동안 목포해경에서 안산 분향소로 옮겨진 유품들 속에서 윤희가 끌고 갔던 케리어를 찾아 품에 안고 통곡하시던 윤희 어머니가 떠오릅니다.

 

동거차도 인양작업현장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긴 한 숨을 지으시던 아버님의 슬픈 모습도 떠오릅니다.

 

윤희의 흔적을 찾아 헤매던 엄마는 인천항 부두에 설치된 CCTV 영상에서 윤희의 마지막 모습을 확인했습니다.
윤희는 통화를 하며 캐리어를 끌고 세월호를 타러 가고 있었습니다.

 

윤희의 메모장에는 엄마, 아빠, 동생이 가장 소중하다고 적혀있었답니다. 윤희는 가장소중한 가족과 친구들과 이별후

 

경기도 평택서호추모공원에 친구들과 함께 잠들어 있습니다.

최진아 – 단원고 2학년 9반

진아는 무남독녀 외동딸 입니다.
진아 가족에게 진아는 결혼후 3년만에 하늘에서 내려준 선물이었습니다.
다니던 병원에서 아이가 생길수 없다고 하자 큰병원으로 옮겨서도 아이가 생길 확률이 0.01%라고 했었답니다.
그래서 부모님도 외동딸 진아를 지극 정성으로 키웠답니다.

 

좋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 아이를 위한 것이라고 믿었고 진아는 부부에게 삶의 전부였습니다.
부모님의 기대대로 자라면서 착하고 말썽 한번 부려본 적 없는 진아였기에
어른들의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가만히 있었지 않았겠느냐며 더욱 안타까워 하십니다.
외동딸 진아를 황망히 잃고 아버지는 세번이나 쓰러지셔서 엠블런스에 실려 병원을 찾았습니다.

 

살아 있을 거라고, 에어포켓이 있을 거라고, 구조할 거라고 국가에 기대했던 시간 만큼 아이가 겪었을 고통을 생각하면
더욱 분통터지고 괴로워 하시는 게 부모님의 안타까운 마음들입니다.

 

그러나
국가는 단 한명의 아이들도 구조하지 않았습니다.
진아부모님은 이웃동네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이사하면서 진아와의 약속대로 큰사이즈의 침대와 새 장농을 들여 놓으며 진아방을 새롭게 꾸몄습니다.

 

하지만
방주인은 사고후 열흘만인 4월 26일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와 경기도 화성 효원추모공원에 잠들어 있습니다.

편다인 – 단원고 2학년 9반

강렬한 불빛이 눈을 파고들고 다인이는 눈을 감았다. 테이블 맞은편의 경미도 고개를 숙이고 종이뭉치를 들여다 보고있고…
조명을 받으며 의자에 앉아있는 다인이는 일 등급 자식을 만들려고 남편의 신체까지 팔아먹는 비정한 인간이다.

 

다인이는 마른침을 삼키고 첫 대사를 땠다.
“사장님 이게 도대채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제 무대밖 세상은 온전히 사라지고 다인이는 비정한 엄마로 변신해있다.
조명이 꺼지고 관객들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편다인 !너정말 제대로 던데.애썼어”
단원고가 금상에 선정되었다는 소리에 배향매가 옆구리를 찔렀다.
다인이의 생애 첫 연극은 이렇게 화려하게 막을 내렸습니다.
다인이의 꿈은 수의사가 되는 것 이었습니다. 이세상에서는 뭐든 되어야 사람대접을 받는다는것을 알았을 때부터 수의사가 되고 싶어했자고 합니다.

 

인연에는 유기견 센타에서 데려온 “별”이 큰 역활을 했습니다.
다인이는 별이를 집에 데려온뒤 불로그.대문 이름을 “Star’s story”로 바꾸었습니다.
동물보호문제에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졌고 직접체험으로 토끼를 구해 돌보기도하였습니다.
친구들이 다인이가 쓴 “직접체험보고서” 를 보고 전문가 수준이라며 혀를 내둘렀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연극제가 끝난 이후에는 다인이의 꿈은”뮤지컬 배우”로 바뀌었습니다.
친그들도 놀랐지만 “다인이는 뭐든 한다면 해내잖아!라는 김유민의 말에 무두들 공감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다인이는 뭐든 하나에 빠지면 끝장을 보는 아이였습니다.
친구 송지나가 인피느트의 엘을 좋아한다니까 패틱을 일년동안 세번이나 써준것처럼,
다인이와 엄마는 친구처럼지냈습니다.
“국이”
다인이는 아빠가 어릴 적 이름인 국이라고 부르는게 좋았다고도 합니다.
다인이는 2014년을 방청소로 시작했습니다.
“그래, 이제 진짜 네 연극을 시작 할 때야!
편다인이 주인공이 되어서 무대에 오르는거야. 네 자신을 잃지 말고 마음껏 무대를 누벼봐!”
머리도 짧게 컷트하고 새롭게 시작한 2학년,
그리고 수학여행.

 

다인이는 우리곁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