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16일 잊을 수 없는 그 날의 사고과정과 구조과정, 그리고 희생자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기억과 망각, 우리는 망각과 싸우고 있습니다.
잊지 않고 행동하기 위해서는 기억해야 하며, 기억을 보존해야 하고, 기억을 다른 사람과 나누어야 합니다.
살펴보시고 그날의 기억을, 304명 희생자의 삶을 기억해 주세요.

구태민 – 단원고 2학년 6반

태민이는 연년생 형제가 하나 있는 두 형제의 맏이입니다.
초등학교시절 태민이는 젖살이 통통하게 올라있던 어린이였지만 중학교에 입학하고 사춘기를 맞이하면서 키가 크고 살이 빠지며 날렵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운동을 좋아하시던 아버지처럼 태민이도 몸으로 하는 모든 운동을 좋아했습니다.
동생하고 태민이는 성격이 반대라서 오히려 둘이 잘 맞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형제가 싸우는 일도 별로 없이 잘 지냈다고 합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태민이는 고민을 들어주는 상담사였습니다.
함께 고민하고, 용기를 주고, 비밀을 지켜주는 믿음과 의리를 지키는 친구였다고 합니다.

 

태민이는 그 또래 남자아이답게 운동을 좋아했고, 특히 축구나 달리기를 좋아했습니다.
축구할 때 태민이 포지션은 수비수였습니다. 달리기도 잘 해서 학교에서 운동회가 있을 때는 언제나 계주 선수로 나가서 학년 대표나 반대표를 맡았습니다.
장래의 꿈인 한양대학교 입학후 ROTC나 카투사가 되기 위해서는 기초체력을 만들어야 한다는 미래의 계획까지 짜고 있었습니다.
태민이는 고기 종류를 다 좋아했고, 치즈케익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태민이네 집 생일케익은 언제나 치즈케익이었다고 합니다.
태민이는 활달하고 즐겁게 잘 노는 아이였고, 고등학교 입학하기 전까지는 노는 걸 좋아했습니다.
태민이는 초등학교때부터 해양소년단 활동을 했던 덕분에 바다에서도 유연하게 움직일 줄 알았습니다.
순천이모님댁과 가까운 남해에서 엄마와 함께 요트위에서 영화 (타이타닉) -사진참고- 주인공들처럼 포즈를 취해보기도 했습니다.
눈부신 햇빛이 요트를 비추고 엄마와 요트위에서 당당하게 서 있던 그때,
태민이는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태민이는 지금
인산하늘공원에 잠들어 있습니다.

권순범 – 단원고 2학년 6반

“엄마, 아빠들의 힘이 부족하네, 세상이 야속하다. 이러다가 진상규명을 제대로 못 하는 게 아닐까 싶어.
나중에 아들을 만나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들이 친구, 선생님들과 함께 힘을 합쳐서 도와주면 안될까? 너희는 천사잖아.”

 

순범이는 위로 누나가 둘있는 막내 아들입니다.
18년전 엄마의 생일날에 빛으로 태어난 아이,
그래서 매년12월 20일이 되면
엄마와 함께 생일 파티를 했습니다.
케이크에 불을 붙이고 엄마와 아들이 서로 축하를 해줬습니다.
엄마는 순범이에게 용돈을 순범이는 엄마에게 양말을 선물해 주곤 했답니다.

 

순범이는 몸짱이었습니다.
키 182cm에 조금 마른편이었지만 모델이 되겠다며 열심히 운동을 해서 근육을 만들었습니다.
어린 시절 누군가로부터 “순범이는 모델 하면 좋겠네” 라는 말을 듣고 모델의 꿈을 키웠다고 합니다.
긴 다리와 하얀피부의 순범이 모델을 우린 잃어버렸습니다.

 

순범이는 운동도 잘했습니다.
막내아들 순범이는 두 누나와 함께 커서 그런지 좀 여성적이고 섬세했다고 합니다.
투잡하시는 엄마가 미용실일을 마치고 늦게 집에 들어 오는 엄마를 위해 청소와 빨래를 하고
다시 출근하는 엄마를 위해 토스트나 김치볶음밥을 해놓고 기다리는 효자아들이었습니다.

 

순범이는 어린이 날인 5월 5일 어린이날에 261번이라는 번호표를 달고 엄마품에 돌아왔습니다.
그날따라 어떤 느낌이었는지 목욕을 하고 기다리던 엄마에게 자주 입었던
기린 그림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나와 엄마는 순범이를 금방 알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순범이 어머니는 미용실을 그만두시고 오직 순범이와 친구들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고 계십니다.
진도에서, 국회에서, 청운동에서, 광화문에서, 또한 뛰어난 손재주로 분향소엄마의 공방에서,
또 최근에는 연극으로 투쟁의 장소에는 어김없이 순범이 엄마를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노력을 해도 정부는 감추고 덮기에 바빴습니다.

 

“오늘 밤은 가슴이 답답해.
오늘 하루 참 힘들었는데 잠은 오지 않네. 국회 앞에서 하늘을 쳐다보니 별이 반짝인다.
마치 우리 아이들 같아.
아들아, 넌 나를 보고 있겠지 ? 나는 순범이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아.
세상 어떤 것보다 소중한 아들, 항상 옆에 있어줄 거지 ?
아들아, 사랑한다. 하늘땅만큼.”

 

윗글은 2014년 7월 국회앞에서 특별법제정을 위해 농성한던 때에 순범이 엄마가 쓰신 글입니다.
국민을 위한다는 국회는 이후 철저히 유가족과 국민을 특별법과 시행령으로 우롱했습니다.

 

모델의 꿈, 막내아들 순범이는 안산 하늘공원에 잠들어 있습니다.

김동영 – 단원고 2학년 6반

동영이는 안산에 있는 열 평 남짓한 작은 김밥집 아들이었어요.
동영이라는 이름에서 느껴지듯이 동글한 바가지 스타일 머리에 귀여운 외모를 가졌고,
예쁜 여동생과 함께 엄마, 아빠의 사랑을 받는 착하고 책임감 강한 아들이었지요.

 

동영이는 김밥집 하시는 엄마, 아빠가 힘드실까 그랬는지,
버스를 타고 가라는 엄마 말씀을 어기면서까지 돈을 절약하기 위해 걸어서 학교에 다녔대요.
따로 학원을 다니지 않았어도 좋은 성적을 올리던 동영이는,
부모님의 결혼 기념일을 기억해 꽃을 선물해 주던 세심한 아들이기도 했어요.

 

바쁜 엄마 대신 설거지도 해주던 동영이 그러다 4월 15일 친구들과 들뜬 마음으로 떠난 수학여행.

 

하지만
동영이와 친구들이 탄 세월호는 목적지인 제주도를 향해 항해하다 16일 아침 진도 앞바다 맹골수도에서 침몰하고 맙니다.
진도가 고향이었던 동영이네는 소식을 듣고 맨처음 할머니가 팽목항에 달려와 사랑하는 손자를 기다리셨지만,
4월이 다가도록 동영이는 가족 품에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동영이 여동생을 돌보기 위해 힘겹게 안산과 진도를 오가시던 엄마.
엄마는 5월 4일 안산에서 다시 진도로 내려가며 동영이 전화기에 ‘엄마 지금 다시 내려가니까 꼭 만나자.’ 라는 카톡을 남겼고,
동영이는 기적처럼 다음날인 5월 5일 어린이날에, 애타게 기다리던 할머니와 부모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5월 8일 어버이날,
동영이를 하늘로 보낸 후 9월 25일 엄마의 꿈에 찾아온 동영이가 엄마에게 “나 장가보내 줘.” 라고 했대요.

 

엄마는 동영이가 얼마나 억울했으면 그랬을까? 하는 생각에 슬퍼하셨고,
하늘에서는 부디 행복하기만 바라시며 머리 맡에 동영이 사진을 두신 채,
잠을 청하신답니다. 차마 아들의 사망 신고도 하지 못하고,
아들을 그리워하고 있는 엄마의 슬픈 눈물을 부디 잊지 말아 주세요.

 

“사랑하는 동영아”
생일 축하해. 2월에 동영이 말고 다른 친구들도 생일 맞았는데 동영이가 2월의 마지막 생일 주인공이야.
또 지숙이랑 제훈이 생일 지나고 며칠 만에 맞는 생일이고~~그러고보니 오늘은 동영이 혼자만 생일이니까 많은 축하 다 받고 있겠네^^
6반 친구들과 함께 즐거운 생일 파티도 열고~~지난 번 꿈에서는 장가 보내달라는 말로 엄마 슬프게 했으니까
오늘밤 꿈에서는 사랑한다 말하고 꼬옥 안아드리렴.
다시 한 번 생일 축하하고 사랑한다 동영아 잊지 않을게. 너와 친구들의 억울함, 꼭 밝혀줄게.

김동협 – 단원고 2학년 6반

“나 울거 같은데…살고 싶은데…나 하고 싶은거 많은데….”

 

“아빠. 나 그냥 공고 갈래”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동협이는 힘들게 일하는 아빠를 위해 빨리 돈을 벌겠다며 아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는 “그래도 대학에 가라” 고 동협이는 설득해 인문계인 단원고에 진학했습니다.
동협이는 학교 연극부에서 활동을 하다 연기 재능을 발견해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습니다.
동협이는 연극부에서도 가장 연기 잘하는 학생이었습니다.

 

세월호가 기울던 4월 16일 오전 9시 22분ㅈ동협이는 급박한 배안의 상황을 휴대전화 동영상에 이렇게 남겼습니다.
동협이의 세상에 남긴 마지막 연기입니다.
“지금 전기가 끊겼고요. 아, 진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해경이 거의 다 왔다고 하는데….저 살고 싶어요. 진짜…”
처음 뉴스 엥커처럼 침착하게 상황을 전하다 갑자기 불안한 목소리로 바꾼 1인 2역은 동협이의 마지막 연기가 됐습니다.

 

세월호 침몰 당시 다섯살 많은 누나에게 전화를 해 “지금 배가 기울고 있는데 다른 가족은 걱정하니까 말하지 말라”고 부탁했던
어른스런 동협이는 5월 4일에 가족의 품에 돌아와 안산 하늘공원에 잠들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
널 지켜주지 못한 못난 부모가
이리 애닳게 너를 부른다.
지금쯤 좋은 곳에서 행복하게 있을 나의 분신…..
그곳에서는 나처럼 못난 애비 마나지 말고
좋은 부모 밑에서 너의 꿈 이루며 행복하게 지내렴.
– 못난 애비가

김민규 – 단원고 2학년 6반

민규의 꿈은 엄마에게 펜션을 사줄정도로 성공한 사업가가 되는 것이였습니다.

 

“엄마, 난 사는 게 너무 행복해”

 

민규가 엄마에게 자주 하던 말입니다.
학교 생활도 재미있게하고 주말이면 친구들과 대학교, 청계천등을 놀러다니며
좋아라하고 행복해하던 모습을 남겼던 민규였습니다.
엄마가 우울해 보이면 기분 풀어주려고 휴대전화로 (개그콘서트)를 보여주며 웃게 하던 아들이였고,
엄마가 아프면 뛰어가 약 사다 주던 다정다감한 아들이였습니다.

 

“엄마는 꿈이 뮈야?”
“나중에 시골에 펜션 지어놓고 아들들이 놀러 오면 고기나 구어 먹고 살고 싶어”하자,
“내가 쉰 살이 되면 돈 많이 벌어서 꼭 엄마한테 펜션 사줄게” 약속했던 민규였습니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회사에 다니며 돈을 모아 40대중반이 되면 사업을
시작하겠다고 구체적인 미래의 그림을 그렸던 민규였습니다.

 

모든 엄마들이 그렇습니다.
아이들 생각에 밥을 먹다가도 울컥해 밥이 넘어가지 않고,아이들을 보면 내 아이 어릴적 모습이 생각 나고,
연인들을 봐도, 학생들을 보면 더더욱….
민규 어머니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활력소요 비타민, 또 희망이였던 민규를 잃어 버렸습니다.

 

“사랑한다, 아들아,
짧은 생이었지만 엄마 아들로 와줘서 정말 고마웠어. 사랑하고 보고 싶고 만지고 싶다.
내 아들 민규.”

김승태 – 단원고 2학년 6반

“소중한 내아들 김승태.
오랫만에 와보는 교실이 왜 이리 낮설은지.
우리 승태가 있어야할 곳에 엄마가 와있네.
그곳에서 잘지내고 있는거지?
너무 보고 싶어.
어디선가 승태가 엄마하고 부르며 아무일 없는 것처럼 나타나 엄마 품에 꼭 안길 것 같구나.
그곳에 서 많은 사랑 받으며 늘 행복했으면 좋겠다.
사랑한다 아들.”

 

승태는 여동생이 하나 있는 맏아들입니다.
축구를 좋아했고 가수 엠씨더맥스의 팬 이었다고 합니다.

 

승태가족은 단란한 가족이었습니다.

 

친구들과 즐겁게 수학여행을 떠났던 승태는 참사 2주째인 4월 29일에 202번이라는 번호표를 달고 부모님품으로 돌아왔습니다

 

부모님은
승태가 떠난걸 믿을 수가 없어서 밤에 잘때도 현관문을 잠그지 않고 거실불도 끄지 않는다고 합니다.
승태가 당장이라도 “엄마, 아빠 다녀왔습니다” 하고 들어 올 것 같기 때문입니다
승태가 그리워서 승태가 입던 겨울 점퍼를 입고 도보순례를 하고 승태를 잊지 않으려고 하나
남은 승태 팬티까지 입고 다니며 아들의 목소리를 자꾸 떠올리시는며 애쓰십니다.

 

3분단 맨앞줄에 앉았던 승태는 안산 하늘공원에 친구들과 함께 잠들어 있습니다.

 

“오빠 난 오빠가 살아 올 거라고 믿어
오빠 강하잖아
그리구 나랑 내친구들다 기도 많이 했어.
다처서라도 돌아와줘 제발!!!
지금 눈물참고 있다.
금방이라도 울것같다 나…
제발 오빠 돌아와줘…
사랑해♡
오빠만 믿을게.”

김승혁 – 단원고 2학년 6반

승혁이는 위로 3살 많은 큰형과 쌍둥이 작은형이 있는 삼형제중에 막내입니다.

 

승혁이는 일란성 쌍둥이입니다.
표정과 머리모습 입는 옷까지 똑같았고 특히 살짝 눈웃음을 치면서 웃는 얼굴은 두 아이가 거울로 반사되는 모습같이 선한 표정의 승혁이였다고 합니다.

 

세월호참사시
다행히도 17년을 같이 자라 온 쌍둥이 작은 형은 다른학교에 재학중이여서 화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큰형을 좋아해서 잘 따랐고, 쌍둥이 작은형과는 친구처럼 붙어 지냈다합니다.
집안에 남자가 많아도 막내들은 조금은 여성스럽고 애교가 많은 듯 합니다.
승혁이도 마찬기지 였습니다.
엄마를 위해 커피를 타 주고 장바구니를 들어주고 직장에서 돌아온 아버지께 발마사지를 해주던 애교덩어리였습니다.

 

“우리는 빵이고 넌 잼이야”
엄마 아빠가 이불을 덮고 누워있으면 가운데로 쏘옥 기어들어온 승혁이에게 빵과 빵사이의 잼처럼 중간에 끼인 승혁이를 밀어부치며 한 말입니다.
그러면 승혁이도 비명을 지르는척 하기도 하며 행복한 나날들을 보내곤 했다고합니다.

 

승혁이는 어렸을적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화가를 꿈꿨으나 고민끝에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실내 건축디자이너가 되고자 했습니다.

 

승혁이네는 세식구만 남겨졌습니다.

 

승혁이는 할아버지의 49재인 4월23일에 돌이왔고, 자신의 생일과 작은 형의 생일날인 6월 3일에 49재 의식을 치러야했습니다.
18살에 사랑하는 동생과 뜻밖의 이별후 홀로서기를 시작한 작은 형 쭈니(집에서의 애칭),
항상 같이 입던 옷을
“미안해서 못 입겠다. 그냥 미안해” 하는 작은 형 쭈니의 마음,
군대에서도 동생과 집안이 걱정되어 날마다 전화하는 큰 형,
남은 두 형제를 위해서도 꿋꿋히 이겨 내겠다는 엄마의 마음을 안고 승혁이는 안산하늘공원에 잠들어 있습니다.

김승환 – 단원고 2학년 6반

승환이는 2남1녀중 둘째였습니다.
순하고 씩씩한 성격에 아빠말은 칼같이 잘듣지만 나름대로 고집이 있는 아이였다 합니다.
승환이 아버님은 착한 아이라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대로 가만히 있었을 거라고 마음아파하십니다.
승환이 아버님이 마지막으로 받은 연락은 출발전에

 

“이제 수학여행 출발해요.조심히 다녀올께요”라는 문자였습니다.

 

승환이는 학교에서 TOP보컬동아리에서 활동했습니다.
‪남현철, 김수빈, 이다운, 김민수, 김정현등이‬ 같이 활동하다 희생된 아이들입니다.
키는 작아도 하얀 피부에 성격도 밝았다합니다.
히든싱어를 좋아하고 사교성도 좋아 주변에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다음은 승환이 선배님이 저에게 승환이에 대해 이야기들려주신내용입니다.

 

“승환이는 남동생같은 후배였어요”

 

항상 웃는얼굴로 먼저 인사해주고 혹시라도 제가 못보고 지나치면
옷깃을 붙잡고 인사를 건네던 아이예요.
굉장히 여리고 감성적이고 순수했던 아이로 기억에남아요.
시험기간에 승환이네반이랑 저희반이랑 학생들을 반반 섞어서 시험을 봤는데
그때마다 초콜릿 주고받으면서 서로 시험잘보라고 말 건내던게 기억에 가장 남아요.
가끔 제가 체육시간 끝나고 마주치면 음료수나 아이스크림을 사와서는 건네주던 아이예요.
키가작고 피부가하얘서 남자아이지만 정말 예쁜 동생이었어요.

남현철 – 단원고 2학년 6반

현철이는
집안의 4대 독자로 귀하고 귀한 아들입니다.
음악과 글쓰기를 좋아했고 수준급의 기타실력을 갖췄습니다.

 

다운이가 불렀고 그룹 포멘의 신용제가 불러주었던 “사랑하는 그대여”를 작사하기도 했을 정도로 음악적 재능 또한 뛰어 났습니다.
여섯살때는 혼자서 할머니의 임종을 지킨 어른스러운 아이이기도 했습니다.
배려심 많고 리더쉽 강했던 현철이의 꿈은 영어선생님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소망

 

-단원고 남현철 군 아버지-

 

이제사
4대 독자 우리 아이
살려 달라 하지 않아요

 

아이만 찾을 수 있다면
양지 바른 곳에 묻어 주고
평생 봉사하고 살 거예요

 

가난해도
부모 노릇 못해도
불평 없이 살아온 아이

 

배려심 많고
리더십 강한 아이
영어 선생님 꿈꾸던 아이

 

형체 알아볼 수 없어도
꼭 찾아 한 번만이라도
부등켜안아 보고 싶어요

박새도 – 단원고 2학년 6반

새도는 형과 누나가 있는 삼남매의 막내입니다.
어머님께서 작년 3월, 새도 없이 맞이하는 첫 번째 생일에 새도에게 쓰신 편지를 보면서
새도가 어떤 아이였고 부모님께 얼마나 사랑받았는지 어느 정도 짐작은 할 수 있었습니다.
어머님께서는 새도가 18년간 어머님 삶의 주체였는데,
해 주지 못한 것이 너무 많고 이제 같이 경험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아 아쉽고 슬프고,
이렇게 새도를 빼앗겨버린 마음이 너무나 분하고 억울하다고 하셨습니다.

 

새도는 어머니가 집에 오시면 “다녀오셨어요” 하며 가방과 손에 든 짐을 받아드리는 다정한 아들이었고,
책을 쌓아놓고 엄마와 함께 진로를 고민하기도 하는 평범한 고등학생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새도의 방에 남은 많은 책들이 새도를 기다리는 것만 같고,
이 모든 일이 그냥 꿈이라서 깨어나 집에 오면 새도가 언제나 그렇듯이 “다녀오셨어요” 하고 맞이해 주었으면 하신다고 편지에 쓰셨습니다.
어머님께 지난 18년간 삶의 중심이었고 형이랑 누나랑 엄마랑 아빠랑 다정한 가족과 함께 아직도 하고 싶은 일,
즐겁고 행복한 일들을 많이 겪으며 한창 성장해야 했을 새도, 어머니께서 많이 보고 싶어하시는 막내 새도를 오래오래 기억하겠습니다.

박영인 – 단원고 2학년 6반

“영인아
늘 제일 먼저와서 우리반 문지기를 담당했는데.
왜 아직 안오니?
너 아침에만 문열고 집에갈 땐 단속 안했잖아.
그러니까 얼른 와.”

 

1361일이 지나도록 아직 돌아오지 못한 영인이는 생일을 네번째나 차가운 바다속에서 맞이합니다.

 

영인이는 운동을 좋아했습니다.
교내에서는 볼링부에서 활동하였으며 밝고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 였습니다.
영인이는 형이 하나 있습니다.
영인이는 또래 남학생들 같지 않게 부모님과 같이 있는 걸 좋아해서
부모님과 셋이서 여행도 많이 다녔다고 합니다.

 

영인이는 축구를 좋아했습니다.
어머니도 영인이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해주셨지만 축구화를 사달라고 했는데 사주지 못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못사주셨던 축구화를 사서 팽목항에 두고 영인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지만

 

영인이는 아직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영인이가 수하여행을 떠날때 가져갔던 가방만 먼저 돌아왔습니다.
어머니는 가방안에서 나온 영인이의 교복과 운동복을 깨끗하게 빨아서 보관하고 계시답니다.

 

처음 사고후에
영인이는 돌아왔다고 해경이 발표했지만 실제로는 영인이 짝꿍인 이다운 이었습니다.

 

2017년 4월 27일 영인이의 교복은 세월호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영인이는 아직 돌아오지 못하고 부모님은 2017년 11월 20일,1314일만에 영인이 없는 장례식을 치러야했습니다.

서재능 – 단원고 2학년 6반

“서재능 . 난 최고의 외교관이 될거야”

 

재능이의 어릴적 꿈은
공부보다는 친구들을 웃기는 데에만 관심있었던 개그맨이 되는 것이 꿈일 정도로 주변의 친구들을 웃겼고
친구들도 재능이 이름을 빗대어 재능이를 “재능교육”이라 부르며 놀리곤 했다고 합니다.

 

단원고에 진학하며
“한국외대에 진학하여 스페인어과를 들어가고 영어와 체코어를 공부하여 최고의 외교관이 되는것”이 재능이의 꿈 이었습니다.

 

엄마가 남들 다 입는 유명 아웃도어 점퍼를 사준다고 해도
“엄마, 전 그런 옷 필요 없어요. 너무 비싼데다가 나만의 개성도 없잖아요.
생각해 보면 남들 따라서 옷 입는 것처럼 줏대없는 행동도 없는것 같아요” 라고 말하는 철든 재능이었습니다.

 

또한 부모님이 일 때문에 늦게오는 날이면 스스로 밥을 차려먹고 설거지에 정리정돈까지 말끔하게 해 놓는 대견한 아들이기도 했습니다.

 

재능이는
수학여행을 다녀온후 여름방학에는 외교관이 되려면 꼭 가보고 싶었던 유럽여행을 가족과 함께 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재능이의 꿈은 수학여행에서 멈추고 말았습니다.

 

☆재능아 오늘 너 생일이라 너무 미안하다 너와 할 일이 많아,
추억 만들일도 많고
갈곳도 많고 해주고 싶은것도 많은데
네가 너무 일찍 아주 멀리 가버렸어.
사랑하고 또 사랑한다.
우리 아들 하늘 나라에서 친구들과
멋진 생일 파티 하길바래.
사랑해
우리 멋진아들.착한아들, 예쁜 아들…
ㅡ엄마가ㅡ ☆

 

엄마의 생일 편지 글처럼 재능이는 멋지고
착하고 예쁜 아들이였습니다.
또한
재능이는 엄마에게 전부였고,
산같은 존재였으며 엔돌핀 이였습니다.

 

어느날 오후
아빠의 꿈에 나타난
재능이는 방에서 팬티차림으로 뛰어나와 거실을 뱅글 뱅글 돌고 있어서 어지럽다고 그만하라고 소리질렀답니다.
평소처럼 팬티만 입고 집안 여기저기를 뛰어다니고 큰 거울 앞에 서서 몸매를
거울에 비춰보며 여러가지 동작을 하며 폼잡던 어린애 같은 천진 난만한 모습으로,
호탕하게 웃는 모습으로 나타났다합니다.

 

살아생전의 그모습 그대로 아빠의 꿈에 다녀간 재능이는
안산 하늘공원에 잠들어 있습니다.

선우진 – 단원고 2학년 6반

순남아”
우진이가 가장 사랑했던 이름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아주 가끔 “엄마” 라고 불렀습니다.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을 두고 떠난 아들. 우진이.

 

우진이는 열살아래 여동생이 있는 남매중에 맏이 입니다.
여느집처럼 늦둥이 여동생을 보고 부모님과 행복해하던 시절,
우진이가 5학년에서 6학년으로 올라가던 겨울 아빠가 큰 사고를 당해 의식을 잃은 상태가 계속 되었습니다.
아빠를 좋아했고 친했던 우진이는 그렇게 누워 있는 아빠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우진이도 이때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엄마에게는 믿음직한 아들, 동생에게는 아빠같은 오빠가 됐습니다.

 

“순남아”
“너 왜 자꾸 엄마 이름 불러?”
“그럼 순남이를 순남이라고 부르지 남순이라고 불러?”
엄마와 의견대립이 있을때도 먼저 “순남아 미안해”하며 사과를 하고 능청스러운 아들로 돌아
오기도 했으며 엄마에게 손편지를 자주 쓰며 마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순남이는 오빠만 믿어”

 

우진이가 편지에 자주 남겼던 말입니다.
아빠가 가족곁을 떠난것은 우진이가 수학여행을 떠나기 몇달전 겨울이었습니다.
그때도 우진이는 엄마에게

 

그렇게 우진이는 집안의 기둥, 아니, 어린 동생과 힘들어 하는 엄마가 보호받고 쉴 수 있는그런 “집”이 되었습니다.

 

우진이의 꿈은
축구해설가가 되는 것이 꿈이 었습니다.
태권도와 축구등을 잘했고 축구선수를 꿈꿨지만 엄마가 돈 되는 일을 하라고 반대하자 축구해설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새벽에 유럽축구를 보면서 해드폰을 끼고 모니터 앞에 앉아 해설을 하곤 했습니다.

 

184cm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에 패션 감각도 뛰어나 인기도 많았던 우진이는 수학여행을 떠나는 날에 동생에게
“엄마 말 잘 듣고, 금요일까지만 기다리면 돼”라고 말했고
“우진아, 안 가면 안 돼?”하며 붙잡는 엄마에게는
“괜찮아. 갖다올게”라며 긴 손가락을 들어올려 까딱이며 고개를 숙이고 눈인사를 하고 수학여행은 떠났습니다.

 

그리고 집안의 기둥이자 집 이었던 우진이를 집어삼킨 세월호 참사.

 

우진이는 5월 5일 돌아왔습니다.
참사후 2주가 넘게 지났지만 예쁜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수학여행에 싸 간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고 차고 있던 시계도 그대로 였으며 흉터 자국도,
피어싱 한 흔적도, 화상 자국도 모두 그대로 였습니다.
딱 한 가지. 입고 있는 속옷만이 우진이 것이 아니 었다고 합니다.
수소문 결과 15일밤 아이들은 서로 속옷을 바꿔 입으면서 놀았다고 합니다.

 

엄마는 가끔 노래를 듣는답니다.
우진이가 한 소절 부르고 엄마가 또 따라 불렀던 노래,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살아가는 이유
꿈을 꾸는 이유
모두가 너라는 걸
네가 있는 세상
살아가는 동안
더 좋은 것은 없을 거야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신호성 – 단원고 2학년 6반

호성이는
태어나서 3일이 지나면서 목을 가눌정도로 4.25kg의 우량아로 태어났습니다.
호성이는 위로 7살 차이가 나는 형이 있는 형제중에 막내입니다.

 

어려서 걷는 것보다 말하기를 먼저 배웠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성장후에는 누군가와 조곤조곤 말하기를 좋아하였고 말 잘하는 아이,
배려를 많이 하는 아이, 자기 인생에 고민을 많이 하는 아이였습니다.

 

호성이의 꿈은
국어선생님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단원고 진학후 1학년 담임이셨던 국어선생님이 학생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학생들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했고
재미있게 수업을 하셨던 영향이 컷다고 합니다.

 

호성이는 중학교때까지 매주 네권의 책을 읽던 독서광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글짓기와 시를 쓰는것을 좋아했습니다.
또 호성이는 엄마에게 자신에 대해 자주 물었다고 합니다.
” 엄마, 날 어떻게 생각해? 내가 없다면 어땠을거 같아?”
그럼 엄마는
” 우리 아들은 공기야, 엄마가 숨쉴수 있는 공기! 아들 없으면 엄마는 못 살거 같아”
답하곤 했습니다.

 

엄마에게 살갑고 다정했던 호성이는 빌라의 반장을 맡고 계신 엄마가 저녁시간에 관리비를 받으러 다니시면
뒤에서 후레쉬를 비춰주며 졸졸 쫒아다니며
” 엄마 조심 조심”하기도 했고, 자기가 아팠을때 엄마가 감기 기운이 있다면 “엄마하고 나하고는 연결되어 있잖아.
그래서 그래” 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렸을적부터 집근처 올림픽수영장에서 수영을 배워 최상급 실력까지 갖춘 호성이를
안산시에서 수영선수로 발탁하려고 까지 했었습니다.
이런 아이들에게 어른들은 “가만히 있으라” 고 했습니다.

 

호성이는 세월호 침몰후 16일째인 5월 2일에야 가족의 품으로 돌아와 안산 하늘공원에 잠들어 있습니다.

이건계 – 단원고 2학년 6반

양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귀여운 미소를 지닌 건계,
건계는 위로 누나가 한 명 있는 집안의 막내입니다.
건계는 태어났을 때 심장이 좋지 않았답니다.
생후 보름만에 병원 수술대에 올라 백일때까지 중환자실에 누워있었습니다.
한차례 시술과 세살때 3차 수술을 받고 이후로는 정기검진 외에는 한차례도 병원신세를 지지 않을 정도로 건강하게 자랐습니다.
부모님도 건계가 “건강하게 계속 자라라고 “건계”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리고 172cm 70kg 체격으로 이름처럼 건강하게 계속 자라나서 튼튼해졌습니다.
많이 뛰는 운동외에는 가벼운 운동으로 꾸준히 건강관리를 잘했습니다.
건계 어머님 핸드폰에는 건강검진 날짜가 가득 예약돼 있다고 합니다.
건계의 절친은 같은 반 이장환입니다.

 

학교에서도 멘토인 누나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여학생말에 귀기울여주고 세심하게 배려해준 덕분인지 여학생들에게도 인기가 많았습니다.
건계는 집안일을 잘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수학여행을 떠나게 되었을 때 건계는 다른 학생들처럼 신이 나서 들떠 있었습니다.
친구들과 추억을 만들고 싶다며 건강검진도 수학여행 후로 미뤘습니다.
떠나기 이틀 전부터 벌써 짐을 싸기 시작했고, 어머니가 농담삼아 “수학여행 가지 말까?”라고 하시니까 화를 냈다고 합니다.
건계는 그 정도로 수학여행에 잔뜩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속깊고 배려심 많은 건계의 꿈은
그래픽 디자이너였습니다. 대학에 진학하면 그래픽을 전공하고 싶어서 혼자서도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그러다가 정식으로 미술학원을 다니면서 건계는 그림 실력이 쑥쑥 늘었다고 합니다.
참사가 일어났을 때, 건계 부모님은 물론 누나와 사촌동생까지 건계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녹색 편지 – 도종환 (건계)

 

봄 4월. 어린잎에 연둣빛이 은은히 감돌면 제가 다녀간 줄 아세요.
느티나무 잎이 붉게 물들어 빛깔 고우면 제가 색칠을 하고 있는 줄 아세요.
까치집 둥지에도 가만히 앉았다 가고, 우듬지 끝을 흔드는 바람에 섞여 다녀가기도 할게요.
누나가 나 대신 엄마에게 얼마나 자주 전화하는지 볼게요.
가만히 있다 눈물을 주르르 흘리곤 하는 아빠를 누나가 얼마나 자주 안아드리는지 볼게요.
엄마와 아빠가 서로를 얼마나 위로하고 사랑하는지 창문으로 들여다보곤 할게요.
내가 좋아하는 녹색 양말을 신고 녹색 모자를 쓰고 가만히 왔다가곤 할게요.
엄마와 아빠와 누나와 친구들이 나를 기억해주는 동안 나는 아직 살아 있는 거예요.
기억하는 게 사랑하는 거예요.
기억하는 게 나를 살아 있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나도 바람으로 다가가고 별빛으로 반짝이며 있을게요.
엄마가 제 가슴에 새겨준 문자처럼 사랑해요 많이많이 사랑해요.
내가 해드릴 수 있는 마지막 말
엄마, 아빠, 누나 사랑해요.

이다운 – 단원고 2학년 6반

☆노래로 시작하고 노래로 하루를 끝내는 소년☆

 

다운이는 그런 아이였습니다.
할머니를 포옹하고 형같은 아빠를 응원하고 동생을 다독이는 “집안의 에너지 빌전소” 였습니다.
다운이는 한 살 어린 여동생이 있는 남매중에 맏이 입니다.
오누이는 시시때때로 붙어다녔다고 합니다.
유치원도 학교도 같이 다니며 늘 손을 잡고 다녔기에 “쌍둥이”같다며 오해받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중학교 1학년때부터 독학으로 배우기 시작한 기타연주 실력은 날로 늘어 났습니다.

 

다운이의 꿈은
대중의 사랑을 받는 뮤지션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때에는 “슈퍼스타K”오디션 무대에 서기도 하였습니다.
다운이는 친구관계에서도 늘 중심이였습니다.
왕따당하는 친구를 보듬어 친구들과 어울리도록 이끌고 축구, 달리기, 보컬부, 볼링부, 노래방등에서
어울려도 늘 다운이가 중심이 되었습니다.

 

다운이는
중3때부터 자기 용돈을 벌기위해 주말 야간 포장작업, 편의점, 당구장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합니다.
그 돈으로 자신과 동생, 할머니의 선물, 스승의 날 담임선생님의 선물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수학여행 출발 열흘전
처음으로 발급된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고 책임감과 자부심에 스스로 뿌듯해했던 다운이

 

다운이에게는

 

애틋한 친구가 두명 있습니다.
수학여행을 떠나기 직전 뇌종양 수술을 받았던 같은반 박진수,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에 담임선생님이신 이해봉선생님과 면회를 갔던 다운이는
“수학여행 갔다와서 다시 들를게. 기다리고 있어. 노래방에가서 내 노래 들려줄게. 너 완전히 뿅 갈거다”

 

하지만 다운이와 친구들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친구들이 보고 싶다”던 진수는 2015년 6월 16일 다운이와 친구들 그리고 선생님 곁으로 떠났습니다.

 

또 한명의 친구,
다운이의 짝꿍은 박영인 입니다.
영인이와 같은반 남현철은 1071일이 지나는 오늘까지도 세월호속에 남아있습니다.
다운이는 경기도 평택 서호추모공원에 잠들어 있습니다.

이세현 – 단원고 2학년 6반

“사랑하는 우리 세현이
눈도 예쁘고 코도 예쁘고 안예쁜곳이 없던 너. 우진이랑 잘 지내고 있어?
너의 그 보석같은 파란눈이 너무 보고 싶다.
우리 야자도 같이 했었는데, 은근 뺀질이~
꿈에서 또 야자하자. 물론 공부하면서 열심히 노는걸로!!
보고싶다.이세현”

 

지난 8월 교실이전을 하던 날 세현이 할머니의 절규가 생각납니다.

 

세현이의 어머니는 러시아분 이셨습니다.
하지만 세현이가 돌 무렵 러시아로 돌아가셨고 이후 세현이는 할머니와 아빠와 함께 자랐습니다.

 

치킨. 비타민 워터. 얼음 아이스크림과 초콜릿을 좋아했던 세현이는 겁이 좀 많았다합니다.
고양이를 보고도 겁을 먹었고 아버지가 운전을 할때에도 꼭 안전벨트를 메고 가족의 안전벨트를 챙기던 아이였다합니다.

 

세현이의 꿈은 회계사가 되는것이였습니다.
세현이에게는 초등학교 5학년에 다니는 여동생이 있는데 세현이는 어린 여동생을 살뜰하게 챙겨주고 아주 많이 배려하는 착한 오빠였습니다.

 

세현이는 친구들과 노는 것을 정말정말 좋아했지만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본인이 스스로 관리를 해서 공부시간과 노는 시간을 나눠서 관리할 정도로 영특했다합니다.
세현이는 진혁, 성빈이와 함께 동네에서 초등학교에서 부터 친하게 지냈지만 세월호 사고로 세친구 모두 희생되었습니다.
회계사가 꿈이였던 세현이는 아버지께 회계사가 어떤일은 하는지 어떻게 하면 회계사가 될 수 있는지등을 물어 보았다고 합니다.

 

세현이 아버지는 일을 하시다가 오후가 되면 세헌이를 보러 분향소에 한두시간정도 있다가 들어오십니다.
세현이 없이 눈뜨는 아침이 가장 괴로운데 아직도 인양도 안되고 세현이에게 해 줄 말이 없어져서 더욱 많이 힘들다고 하십니다.
5월 1일 가족의 품에 돌아온 세현이는 화성효원추모공원에 잠들어 있습니다.

이영만 – 단원고 2학년 6반

6반 영만이는
기도와 식도가 붙어있는 ‘기관지 식도루’라는 병을 안고 태어났어요.
출생 5일만에 수술을 받은 영만이는 기도가 작아서 음식물을 삼키기 힘들어했고
한 번은 사과 조각이 목에 걸려 위험한 순간을 맞기도 했지요.
다행히 검사 중 크게 울음을 터뜨린 덕분에 사과 조각이 넘어가 가까스로 고비를 넘기기도 했고요.

 

엄마는 그 후 2년여간 섭취한 음식물이 행여나 기도로 넘어갈까 싶어 영만이를 쿠션에 앉혀서 재웠답니다.

 

약하게 태어났지만 커가면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축구를 좋아하고 5km 마라톤에서는 4등을 할 정도로 운동을 잘했어요.
항상 웃는 얼굴로 학교도 좋고 친구들도 좋아서 행복하다던 영만이~~
공부도 잘해 미국 항공 우주국인 NASA에서 우주를 연구하는 우주학자를 꿈꾸었던 영만이는,

 

4월 16일 아침,
침몰하는 세월호에 갇혀 돌아오지 못할 긴 여행을 떠났고 지금은 평택 서호추모관에 잠들어 있습니다.

이장환 – 단원고 2학년 6반

☆요며칠 잠깐 잠깐 엄마한테 왔다가줘서
고마워.
꿈의 내용은 기억이 안나지만 너의 얼굴만은 또렸이 기억나는구나.
보고싶다. 아들.
그렇게 잠깐씩이라도 자주왔다 가줘라.
친구들과도 잘 지내고 있으렴.
엄마 가는 그날까지…..☆

 

수학여행을 떠나기 정확히 한달전 장환이네는 큰집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전까지는 중학교 3학년이던 남동생과 함께 방을 쓰던 장환이에게 처음으로 자기방이 생기자 친구들은 신나서
자주 장환이집에 놀러왔습니다.
늘 집에 놀러오던 한 친구는”수학여행 갔다가오면 옥상에서 삼겹살 파티해달라”고 넉살좋게 이야기했고 장환이 엄마는 약속을 했습니다.
하지만 장환이와 친구들은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장환이의 꿈은 패션디자이너였습니다.
비록 이루지 못했지만 장환이가 스케치해놓은 그림을 디자이너 이상봉선생님께서 옷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집에서는 다정다감하고 엄마에게는 코믹함도 선사하며 웃음주던 장환이,엄마를 안아주며 좌우로 흔들기도하고,
찬손을 목이나 등에 갖다대며 장난치던 장환이는 사고후 4월 20일,
엄마,아빠의 결혼 기념일날에 돌아와 지금은 하늘공원에 잠들어있습니다.
엄마와 장환이와 붕어빵 남동생은 형이 다니던 단원고에 입학하여 재학중에 있습니다.

이태민 – 단원고 2학년 6반

“엄마 왔어.
우리아들 엄마보고있니?
너무 마음이 아프네
오랜만에 학교 너의 책상을 보니 열심히 너의 꿈을 펼치고 있어야 할 우리아들의 빈자리 너무 아프다.
사랑해, 우리 아기 엄마 맘 잘 알지?
너를 너무 사랑해 엄마가 널 볼수 있는 그날까지 잘 지내고있어. 알았지.”

 

6반에는 두명의 태민이가 있습니다.
구태민과 이태민.
오늘은 이태민의 생일입니다.
태민이에게는 초1, 중3 두여동생이 있습니다.
함께 가게를 운영하는 부모님이 매일 밤늦게 집에 들어오면 어김없이 식탁에는 태민이가 차려놓은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태민이는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어릴적부터 어린 동생들을 돌봤습니다.
커서는 직접 동생들의 끼니를 챙겨주며 청소, 빨래등 집안일을 도맡았습니다.
요리에 취미를 붙인 태민이는 엄마를 졸라 고등학교부터 요리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태민이의 꿈은 *호텔 요리사*가 되는 것이였습니다.

 

4월15일 아침,
태민이는 엄마에게 “잘 다녀올께”라는 말을 남기고 수학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태민이는 세월호참사 17일만인 5월 3일에야 부모님품으로 돌아왔습니다.
2013년 엄마의 생일때 함박 스테이크를 만들어 주며

 

“다음엔 더 근사하게 차려줄께. 생일 축하해”하며
쑥스럽게 웃으며 약속했던 태민이는 더이상 약속을 지킬수 없게 되었습니다.
장례를 치른뒤 태민이는 엄마의 꿈에 나타났습니다.
꿈에서 태민이는
” 나 때문에 울지 말라”며
엄마를 위로하고 작별인사를 했다합니다.
이후 태민이는 한 번도 엄마의 꿈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태민이의 짝꿍은 박새도입니다.

전현탁 – 단원고 2학년 6반

현탁이는
누나가 있는 남매중에 막내입니다.
인터넷커뮤니티 뿜뿌에서 건9왕이라는 아이디로 활동했으며
2014년 4월15일 자신의 생일날에 수학여행을 떠났습니다.
“수학여행을 가는 15일이 내 생일이다. 곧 주민등록증이 나온다” 라며 기대감을 나타냈던 현탁이였습니다.

 

수학여행을 떠나기 몇일전부터
현관에 여행가방을 놓고 갖고 갈 물건들을 하나씩 정리하곤 웃으며 떠나던 모습이 현탁이의 마지막 모습이 되어 버렸습니다.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 용돈으로 2만원을 쥐어주며 “제주도는 물도 맛있으니까 많이 사먹어” 라고 보냈지만 그대로 간직한채 돌아온 현탁이입니다.
300mm 신발을 신을 정도로 덩치가 컷던 믿음직했으며,
유명메이커 옷을 못 사줘도 떼 한번 안쓰던 아이였습니다.

 

학교 주변에서 부모님이 세탁소를 하여도 부끄러워 하지 않고 “엄마 난 괜찮아”라며 되려 엄마를 위로하던 효자 아들이었습니다.
이런 현탁이를 엄마는 밥만 먹고도 감기한번 안걸리고 건강하게 잘 자라주어 편하게 해준 아이였다고합니다.

 

엄마는,
수학여행 전날 생전 처음으로
편지를 쓰고 싶어
“듬직하게 잘 커줘서 고맙고 엄마는 네가 있어 정말 행복하다”라고 썼답니다.

 

엄마는 현탁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팽목항에 내려갔을때 캄캄한 바다를 향해

 

“행복은 이걸로 끝이다, 이놈아~!”
라며 외쳤습니다.

 

2015년 안산에서 광화문까지 도보행진 이틀째 날,
여의도에서 현탁이를 가슴에 품은 채로 하늘만 바라보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어머니가 들려주신
현탁이의 꿈은
“아나운서 손병수씨를 좋아해 아나운서가 꿈이였어요….”입니다.

 

꿈을 향해 전진하던 현탁이의 꿈은 세월호 침몰과 함께사라져 버렸고 보름후에야 엄마품에 돌아온 현탁이는
친구들과 함께 평택서호추모공원에 잠들어 있습니다.

정원석 – 단원고 2학년 6반

고작 열 일곱, 여덟해를 사랑하는 엄마,아빠곁을 다녀간 아이들…

 

이 아이들이 생일이면 더욱 사무치게 보고픈 오늘을 맞이한 가족들…

 

시 : 신호현

 

국군장교의 꿈

 

국군 장교가 되어
엄마와 누나를 지켜주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아이야

 

엄마의 퇴근길
찻길에서 팔짱 끼어주고
누나 마중을 다녔던 아이야

 

비오는 날에
파지 줍는 할머니
파지 줍고 모셔드린 아이야

 

친구 차비 없다고
자신의 차비를 내어주고
집까지 터벅터벅 걸어온 아이야

 

16일에 친구들과
갑판까지 나왔다가
다른 친구 구하러 간 아이야

 

늦둥이로 태어나
남을 위해 대견히 살다가
하늘로 떠난 장한 나의 아들아

 

하늘 나라 장교가 되어
어두운 이 나라 지키고
통일 조국앞에 우뚝 서거라

 

6반 정원석을 소개한 시입니다.

 

얼마나 개탄스러운 나라인지..위기대응책도 없는 썩은 나라인지…
원석이를 DNA가 세번이나 맞지않는데도 다른사람이 원석이를 데려가 이틀을 장례치르고 서야 원석이는 비로소 엄마, 아빠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5남매의 막내아들 원석이를 부모님은 이렇게 떠나보낼 수 있었습니다.

 

원석이는 누나가 넷이나 있는 5남매의 막내입니다. 여자들 많은 집에서 혼자 남자라서 원석이는 엄마랑 누나들 안전을 항상 걱정했습니다.
중학교 때는 엄마와 누나들에게 세상이 험하니 호신술을 배워야 한다며 가르쳐드렸습니다.
주짓수를 배워서 엄마와 누나를 지켜주겠다고 큰소리를 치기도 했습니다.

 

원석이는 엄마가 퇴근하는 시간에 마중 나와서 같이 걸었고, 찻길은 위험하다며 엄마를 길 안쪽으로 걸으시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원석이는 그렇게 엄마랑 같이 팔짱도 끼고 손을 꼭 잡고 걸어서 집에 돌아오는 다정한 막내였습니다.

 

원석이는 가족들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예의바르고 배려가 깊은 아이였습니다.
비 오는 날 길에서 비를 맞으며 파지 주우시는 할머니를 보고, 원석이는 함께 파지를 주워드리고 할머니를 부축해서 댁까지 모셔다 드렸다고 합니다.
친구가 차비가 없다고 해서 자기 차비를 주고 학교에서 집까지 걸어온 적도 있습니다.

 

세월호가 침몰하기 시작했을 때도 원석이는 다른 친구들과 함께 갑판까지 나왔습니다.
그러나 원석이는 선실 안에서 잠자고 있던 친구를 데리고 나오려고 다시 배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원석이는 그렇게 마지막 순간까지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다음은 38세에 늦둥이 원석이를 얻었던 어머니 박지민님의 글중에 한부분입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정치라는 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왜 그렇게 살았는지 후회만 할 뿐입니다.
내가 너무 무식하게 살아서 내 아들을 잃은거 같아 엄마는 가슴을 치고 또 칩니다.”

최덕하 – 단원고 2학년 6반

“엄만 우리 덕하가 119에 최초로 신고 했다는 것을 늦게야 알았어. 우리 아들 참 자랑스럽고 믿음직 스럽고 장하다.
그리고 아직 배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너 친구들 모두 구해줘. 이제 여기는 잊고 아직 물속에 있는 네 친구들을 부탁해.
배 안에 남아 있는 사람들 다 구해주시라고, 다 건져주시라고 하느님께 부탁해줘.
영원히 사랑한다 아들아.”

 

경호원이 꿈이었던
덕하는 평소 온순하고 착했으며 항상 스스로 모든 일을 알아서 처리하는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중학교 2학년 때는 학년 학생회장을 맡을 정도로 책임감과 리더쉽도 있었습니다.

 

검도 2단인 덕하는 친구들을 구하다가 숨진 4반 정차웅군과 함께 검도학원에 다녔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52분께 전남 소방본부 119 상황실에 다급한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신고한 사람은 세월호 선원도, 배에 탄 어른도 아닌 단원고 최덕하였습니다.
덕하는 배가 침몰 중이어서 모두가 우왕좌왕하는 상황에서도 담임이신 남윤철선생님의 지시대로 침착하게 처음으로 사고를 신고했습니다.

 

덕하의 신고는
승객 등 174명이 구조?(탈출)되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했지만 정작 덕하는 일주일 뒤인
4월 23일 4층 선미에서 구명조끼도 입지 않은 상태로 발견 되었습니다.

 

덕하의 경호원의 꿈은
결국 172명의 귀한 생명을 살리는 숭고한 꿈으로 이뤄졌습니다.

 

덕하는 안산 하늘공원에 잠들어 있습니다.

홍종영 – 단원고 2학년 6반

불과 몇분차이로 장남이 되고 막내가 되고..
247번,
번호표를 달고 3년전 5월 4일 세월호에서 올라왔던 종영이는 쌍둥이 형제중에 형입니다.

 

종영이는
작은일에는 흔들리지 않는 의연함과 책임감이 강하고 반에서 서기역활을 맡을 정도로 빈틈이 없는 아이였습니다.
또한 모든 학우들과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지만 누구라도 불공평하게 대하는 적도 없었습니다.
쌍둥이 동생과는 중학교때까지는 함께 같은 학교에 다녔으나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서로의 독립을 위해서도 잘 된일이라며 다른 학교로 배정된 것을 다행이라 여겼습니다.
불행중 다행으로 동생은 이웃 “ㄱ” 고에 재학중에 화를 면했습니다.

 

종영이의 꿈은
법조인이 되는 것이 였습니다.
방안에 “홍종영의 주거권법”을 만들어 실천에 옮길 정도로 계획성있는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홍종영의 주거권법
1조 (자유)
1.나와 동생은 같은 이집의 주거자로서 평등한 대우를 받는다.
2.나와 동생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서로 도와주고 감싸준다.
(하지만 자신의 자유를 누리고자 할때 부모님과 동생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면 제한될 수 있다)는 부칙을 넣어
다른이들을 배려할 줄도 아는
착한 심성의 소유자이기도 했습니다.

 

초등학교4학년 때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던 종영이는 성가대에서 솔로도 하며 주말에 가족과 함께 놀러가면 일요일에는 꼭 돌아와 교회에 나가던 아이였습니다.
종영이의 학교 생활에서도 ClC활동을 열씸히 하기도 했던 흔적들이 남아 있 습니다.

 

종영이에게도
결코 떼어 놓을 수 없는 친구가 한명 있습니다.
선일중학교때부터 단짝처럼 붙어 다녔던 2반 허다윤 입니다.
다윤이와는 함께 등교하고 집에 올때도 같이왔던 친구였습니다.
생각이 깊고, 공부도 잘하고,
자기주장이 뚜렸하고, 웃기도 잘 웃었던 종영이는 다윤이와는 정반대의 스타일이었지만 공부도 많이
가르쳐주었던 사이였고 수학여행을 떠나는 날 아침에도 다윤이네 집으로가 다윤이와 함께 다윤이 어머니차로 학교까지 이동했었습니다.
종영이의 시신이 안산으로 돌아와 안치 되었을 때에는 옆자리를 다윤이가 안치될 수 있도록 비워달라고 까지 하였으나
다윤이는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올라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사 100일째 되는 날
안산에서 국회까지 100리길을 걸어 국회앞에 도착했을때
“100일이 지났어도 달라진건 하나도 없다.
본분마저 망각한 참 나쁜 사람들” 이라고 종영이 아버지 (홍원표님)은 정치권을 향해 외쳤습니다.
지지부진하던 세월호문제도 국민이 촛불을 들고서야 박근혜를 탄핵했고 3년이 다돼서야 세월호가 물 밖으로 들어 올려졌습니다.
그리고 그날 종영이와 함께 떠났던 다윤이와 미수습자를 찾기위한 수색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노래방에서도 찬송가를 부른다는
종영이는
친구들과 함께 안산하늘공원에 잠이 들어 있습니다.

황민우 – 단원고 2학년 6반

민우는
일곱살, 다섯살 많은 누나가 둘 있는 삼남매중에 막내입니다.
가수 아이유를 좋아하여 휴대폰 바탕화면을 아이유로 꾸며 놓기도 하였습니다.
어렸을적 앓은 질병으로 채식위주로 식단을 꾸렸지만 꾸준한 건강관리로
체력을 키우고 운동을 즐겨했던 민우는 단윈고에 진학하며 축구부에서 활동할 정도로 날렵하고 건강한 아이였습니다.

 

영어를 잘해 영어선생님을 꿈꾸기도 하였으나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체육선생님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아빠의 인터뷰를 보니 민우는 가끔 아빠의 사무실에 놀러와 대표 의자에 앉아
“아빠, 여기가 내 자리야.” 하며 장난을 쳤대요.
출근 길에 그런 민우의 모습을 떠올리시는 민우 아빠의 마음은 얼마나 슬프고 힘겨우실까요?
행여나 슬픈 음악이라도 나오면 눈물 흘릴거 같아 운전 중에 음악도 듣지 못하신다는 민우 아빠.
민우가 떠난지 1년여가 되어가지만 지금도 민우 할머니께서는 새벽밥을 지으시며 우신답니다.

 

새벽밥 해먹이며 곱게 기른 귀하고 예쁜 손자를 그렇게 어이없이 잃으셨으니 눈물이 나올 수밖에 없으시겠지요.
개인 사정상 가족 협의회에 참여하지 못하고 계시는 민우 아빠는 인터뷰를 통해
참사 후 3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바뀐 게 하나도 없는 현실에 분노하고 계십니다.

 

정말 그러실 수 밖에 없지요.
세월호는 인양도 되지 못했고, 그로 인해 아직까지도 아홉분의 실종자가 가족 품에 돌아오지 못하고 계시니까요.
진상 조사 또한 새누리당 조사 위원들의 어이없는 행태로 인해 자꾸만 늦춰지고 있으니 부모님들의 가슴만 타들어가고 있지요.
오죽하면 세월호가 마무리 되면 사업도 정리하시고 민우 위패들고 산에 가서 혼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셨을까요?
이렇게 아픈 가슴으로 민우를 그리워하고 계시는 민우 아빠에게 위로를 보냅니다.

 

4월 17일에 가족의 품에 돌아온 민우는 경기도 평택서호추모공원에 잠들어 있습니다.

 

민우는 늘 이어폰으로 아이유의 노래를 즐겨들었습니다.
그리고
2014년 4월 16일 별이 되었습니다.
아이유의 노랫가사처럼….

 

“내 맘속에 넌 살아있는 별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