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16일 잊을 수 없는 그 날의 사고과정과 구조과정, 그리고 희생자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기억과 망각, 우리는 망각과 싸우고 있습니다.
잊지 않고 행동하기 위해서는 기억해야 하며, 기억을 보존해야 하고, 기억을 다른 사람과 나누어야 합니다.
살펴보시고 그날의 기억을, 304명 희생자의 삶을 기억해 주세요.

김건우 – 단원고 2학년 5반

건우는
여섯살까지 할머니댁에서 자랐습니다.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아서인지 어렸을땐 응석이 심했다고 합니다.
스스로 “할머니엄마아들” 이라고 불렀을 만큼 할머니와 고모의 사랑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라면서 엄마를 잘 챙겨주고 자기일은 스스로 알아서 하는 의젓한 아이로 자랐다고 합니다.

 

건우의 학교생활 또한 밝은 성격답게 친구들과의 교우관계도 좋았습니다.
작지만 운동을 잘했고, 공부 또한 잘해서 성적도 우수 했습니다.

 

2분단 이해봉선생님 교탁 맨 앞자리가 건우의 자리입니다.
사제가 되고 싶어했던 박성호와 짝꿍지기였죠.
모두가 주인되는 2학년 5반에서는 서기 역활을 맡아 “교과 선생님들께 출결확인받기와 결석 및 지각생 파악, 학급게시판 관리”를 맡았습니다.
그래서인지 5반의 개시판은 매우 잘 정돈되어 있습니다.

 

또한 건우는 운동을 좋아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때부터 줄넘기를 시작하여 혼자서 연습하여 대회에 나가 상을 탈 정도로 잘했다고 합니다. 자전거도 잘타서 체육선생님께서 데리고 나가서 대회에 출전시킬 정도였다고합니다.
축구 또한 1학년 때부터 학교 축구부로 활동했을 정도로 잘했구요.
주말이나 쉬는 날에는 선배들과 친구들과 축구로 심신을 단련할 정도로 모든 운동에 소질을 보였습니다.
또한 학교에서도 친구들을 잘 보살피고 항상 배려할 줄 알았던 건우였습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좋았던 건우였지만 선생님들도 예의 바른 건우를 좋아했다합니다.

 

“엄마 나는 꼭 체육선생님이 될거야.애들 가르치는게 너무 재밌을 거 같아 ”

 

건우는 체육선생님이 되는 게 꿈이였습니다.
운동을 좋아하고 친구들을 좋아했던 건우였기에 충분히 가능한 꿈이였습니다.

 

운명의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하던 오전 9시 50분경 건우는 초등학교 6학년때 담임선생님과의 통화에서는 “무섭다”라고 했지만 비슷한 시간 엄마와 통화하면서는
“엄마, 난 안전 하니까 걱정하지마. 구조대 다 왔어. 소리도 들려.나가서 전화할께”라며 엄마를 안심시켰던 아이였습니다.
수학여행에서 돌아오는 4월18일 금요일에 축구부형들과 축구를 할 계획이었던 건우는 결국 금요일에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구조의 골든타임을 모두 놓쳐 버리고 시간만 허비하다 해경이 처음 선체로 진입한 4월 19일에야 세살 많은 형과 부모님곁으로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와 화성효원추모공원에 잠들어 있습니다.

 

♡엄마는 아직도 우리 아들이 제주도에 있을 것만 같은데…제주도 가면 만날 수 있는 걸까? 학교 끝날 시간되면 지금도 엄마는 전화기를 자꾸 쳐다보고 있어 ” 엄마 어디?” 하고 전화 올 것만 같아.
“오늘 저녁 반찬은 뭐야? 엄마,”
지금도 자꾸 뒤돌아보게 돼.♡

김건우 – 단원고 2학년 5반

건우는 드럼연주를 좋아했습니다. ”

 

건우는 남동생이 하나 있는 형제중에 맏이입니다.

 

“시크한 차도남”

 

차가운것 같으면서도 속깊은 아이가 건우입니다.
선이 굵을 정도로 불합리한 것을 싫어하고 가차없이 비판도 하고 성격이 급하지만 안풀리는게 있으면 끝까지 파고드는 기질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친구가 많지 않지만 진짜 친구다 싶으면 자기걸 다 내어주는 그런 건우였습니다. 선이 굵은 아이.

 

건우는 단원중시절 8명의 멤버로 결성된 ADHD멤버 드럼연주자였습니다.
이들 멤버들중 단원고로 5명이 진학하였고 5명 모두 안타깝게도
세월호의 비극을 피해가지 못했습니다. (박수현,홍순영,오경미,이재욱,김건우)

 

화성효원추모공원에 잠들어 있는 건우의 유골함앞에는 생전 건우가 사용하던 드럼스틱 두개가 가지런히 놓여있습니다.

김도현 – 단원고 2학년 5반

도현이는 누나가 하나 있는 남매중 막내입니다.
어렸을적부터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서 한번 듣고 보는 그대로를 따라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어릴적부터 친했던 이다운과 같이 반까지 같이 되며 초등학교대부터
기타를 쳤던 다운이에게 어깨너머로 기타를 익혔고 공단에가서 몇날 며칠을 아르바이트를 하고 그돈을 모아 기타를 사기도 했습니다.

 

부모님께는 옷한번 사달라 해 본적도 없고 브렌드 신발 한 번 신어 본적이 없는 아이였습니다.
음악에 심취하여 주변에 음악에 빠져드는 친구들이 많이 모였고 소탈하고 밝은 성격탓에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1학년 겨울방학,
엄마와 함께 서울낙원상가 나들이를 하던 도현이는 야마하 그렌드피아노앞에 앉아 허리를 꼿꼿이 세운채
(To the Moon)OST (For River)를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커다란 무대위에 올라 연주를 하는 피아니스트처럼 도현이는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도현이는
이순간 엄마에게 최고의 장면을 선물해줬습니다.
피아니스트의 꿈을 키우던 도현이는 친구들과 무대에 서는 날을 꿈꿨습니다.
엄마와 함께 안산 문화예술의 전당을 지날때면 늘 이렇게 말했습니다.
“친구들이랑 나중에 저런 무대에서 공연도 하고 싶어요”

 

하지만
도현이의 꿈은 2014년 4월 16일로 멈췄습니다.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날 도현이는 커다란 가방에 그간 연주했던 곡들을 담은 노트북과 말가면을 넣었습니다.
수학여행때 제주도에서 친구들을 웃겨주기 위해서 였습니다.
엄마에게 들려준 피아노 연주곡은 지금도 엄마의 이어폰으로 이어져 도현이를 느끼고 계십니다.
도현이는 화성효원추모공원에 잠들어 있습니다.

김민석 – 단원고 2학년 5반

민석이는 아들 둘 형제중에서 동생입니다.
민석이 아버님은 직장때문에 지방에 내려가 계시는 일이 많아서 아이들을 살뜰하게 챙겨주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두아들을 언제나 믿고 든든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 났을때 민석이 아버님은 직장에 계셨는데 설마 식당에서 식사하면서
남의 일처럼 텔레비젼을 보았던 그 배가 민석이가 탄 배일줄은 생각도 못 했다고 하셨습니다.
아버님은 황급히 진도로 내려가셨고 지옥같은 기다림끝에 민석이가 마침내 물 밖으로 나왔을 때에는 정신을 잃고 쓰러지셨다고 합니다.
아버님께 사고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한 사람은 민석이 형이였습니다.
참사이후 민석이 형은 동생이 없는 집이 너무 괴로워서 이모님댁에서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민석이 아버님은 참사후 국회에서 세월호 특별법제정을 위해 민석이와 친구들을 위해 투쟁하셨고 삭발투쟁에도 동참하시었습니다.

김민성 – 단원고 2학년 5반

민성이는
어릴때부터 누나를 잘 따르고 남을 배려하고 온순하게 자랐습니다.
초등학교때부터 태권도를 시작하여 남들보다 빨리 실력이 늘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때 자기방 책상밑에 앉아 친구와 싸우고 울고 있는 민성이에게 “태권도를 배웠으면 맞지 말고 때려주지 그랬어”하고 묻자,
민성이는 “나도 그 애를 때릴 수 있었어. 그런데 내가 때리면 엄마랑 그애 엄마랑 싸울 것 같아서 참았어. 집에 와서 생각하니까 나도 속이 상해서 울었어요” 라고 답했답니다.
민성이는 그렇게 속이 깊었던 아이였습니다.

 

민성이의 꿈은
특공무술을 하는 특수부대에 들어가서 직업군인이 되는 거였습니다.
고교때 183cm까지 키가 컷고 태권도. 합기도. 킥복싱까지 운동에 열심이었습니다.
수학여행가면 운동을 며칠 못한다고 수학여행을 떼나기 몇일간 밤 12시까지 늦도록 운동을 했습니다.
“멋있는 직업군인이나 청와대 경호원이 되어서 엄마 아빠께 꼭 효도 할게요”를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답니다.

 

자신의 생일날 친구들이랑 맛있는 것 먹으라고 준 용돈을 모아서 아빠의 생일선물을 사 온 효자아들이었습니다.
학교에서는 봉사활동 동아리 TOP에서 활동했습니다.
복지시설에 가서 어린아이들을 돌보거나 불편한 노인을 씻기는 등의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사춘기도 넘어가고 생각도 어른스러워졌습니다.
생각도 바르고 어른스럽던 민성이였습니다.

 

수학여행 3일전,
아빠는 무언가 불안감이 들어 수학여행을 보내지 말까하였지만 민성이의 환한 미소에 보내주었습니다.
“아들, 용돈 얼마주면 돼?”
“알아서 주세요. 갔다오면 바로 내생일이니까 또 생일상 차려줄 거 잖아요”
3만원을 주었는데 더 달라고 하면 줄수도 있었는데 민성이는 그걸로 족하다는 듯이 웃으며 집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약속했던 생일날이 되어도 민성이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민성이는 4월29일 배에서 나와 지금은 안산하늘공원에 잠들어 있습니다.

 

엄마는 꿈에서나마 아이에게 따뜻한 밥을 지어주었습니다.
하루는 할아버지 손을 잡고, 하루는 친구들의 손을 잡고 한참을 놀다가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꿈에 나타나 “엄마 나 왔어.학교가야 하는데 교복이 없어”라며 외쳤답니다.
그러나, 교복은 모두 태워버리고 없습니다.

김성현 – 단원고 2학년 5반

성현이는
내성적이고 침착하고 단정한 아이였습니다.
사춘기때도 유난스럽지 않았고 밖에서 보다는 집에서 보내는 것을 더 좋아 했습니다.
운동도 실내에서 하는 베드민턴이과 볼링을 좋아했습니다.
성현이는 학교에서도 볼링부에서 활동했습니다.

 

학교생활도 성실하였고 교과목중에서는 중학교때부떠 역사,한국사에 관심이 많았고 공부도 잘했습니다.
어머님은 성현이가 역사과목에 관심이 많고 담임이신 고 이해봉선생님도 역사선생님이시니
열심히 공부하여 진로를 역사선생님이나 박물관 직원으로 취직할 수 있는 전공을 선택하는 것이
좋을것 같다고 조언하였고 성현이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해봉 선생님처럼 역사선생님의 꿈을 향해 전진하던 성현이는 역사를 왜곡하려는 집단에
구조조치도 받지 못하고 사랑하는 동생 성준이를 남겨둔채로 하늘나라로 수학여행중에 있습니다.

 

성현이는 경기도 화성 효원추모공원에 잠들어 있습니다.

김완준 – 단원고 2학년 5반

완준이는 외동 아들입니다.
내성적이고 조용한 아이였으며 때론 까칠하다가도 어머니께는 늘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속이 따뜻한 아이였습니다.
겉으로 표현은 않았지만 형제가 있는 사춘들이나 친구들을 부러워했다고 합니다.

 

부모님의 늦은 결혼 때문에 동생 대신에 강아지를 키우기를 원했던 완준이는 수학여행을 떠나기 한달전에 동생이라며 푸들 “아롱이”를 집으로 데려와 기르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를 좋아하고 존중해서 아빠처럼 좋은 아빠가 되는 것을 꿈꿨으며, 평소 책 읽는 것을 좋아했던 완준이는 만화중에서 “명탐정 코난”과 “소년탐정 김전일”을 좋아했었던 완준이의 꿈은 프로파일러, 범죄심리분석관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완준이는
세월호가 기울자 자신의 휴대폰으로 사진을 촬영했으며 119와 122에 사고신고전화를 걸었지만 끝내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복원된 휴대폰속 사진에는 “가만히 기다리라”는 어른들의 말을 믿고 장난치던 친구들의 모습들과 물이 차 오르자 구명조끼를 착용하고 불안해하며 기다리는 아이들의 모습이 남겨져 있습니다.

 

4월22일 가족의 품에 돌아와 화성효원추모공원에 잠이 든 완준이 유골함에 어머니는 손수 뜨개질한 털모자를 씌워주었습니다.
또한 5반 희생된 전체 아이들의 사진을 뜨개질로 표현하시며 완준이를 그리워하고 계십니다.

김인호 – 단원고 2학년 5반

“사랑하는 아들 인호야 잘지내지?
넘 보고 싶다 ㅠㅠ
넌 천국에서 잘지내지 .
자꾸 눈물이 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너무 싫어.
너를 위해 눈물 밖에 흘릴수 없네…
엄마 안 보고 싶니?
엄마는 우리아들 너무너무 보고 싶은데..ㅠ
할말은 많은데 우리 아들 엄마가 또 잔소리 한다고 싫어할까봐 오늘은 좀만 울고 좀만 잔소리 할게.. 사랑한다 사랑한다.
그리고 미안해. 정말 너무 너무 미안해.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사랑한다. 우리 인호”

 

사랑했고, 사랑하고, 영원히 사랑할 인호.
인호는 남동생이 있는 형제중에 맏이입니다.

 

인호는 꿈이 많이 아이였습니다.
경찰 할까, 소방관 할까, 군인 할까 고민이 많았다고 합니다.
일요일미다 챙겨 보던 (동물농장)을 보며 사육사가 되고픈 꿈도 키웠습니다.

 

평소 말수는 없지만 꼼꼼하고 세심한 성격에 마음이 따뜻하고 항상 남을 먼저 배려하고 양보했던 착한 아이였습니다.
늘 동생을 걱정하면서 덤벙대지 말라고 충고하고 엄마가 일 때문에 늦게 집에 오면 힘든 엄마를 위해 대신 밥을 하고 엄마 다리가 통통 부었다고 주물러 주던 착한 효자 아들이였습니다.

 

“어머, 차 예쁘다. 엄마도 한번 타보고 싶네”

 

인호와 엄마가 길을 걷다 지나가는 빨간 스포츠카를 보고 엄마가 말하자 인호는 엄마에게 ” 걱정하지 마. 내가 꼭 사줄게” 라고 약속 했습니다.
작년 4월 7일은 엄마의 생일이였습니다.
인호는 그동안 용돈을 모아 손목시계를 엄마에게 선물했습니다.
그러면서 다음에는 스포츠카를 사주겠다는 약속을 잊지 않았습니다.

 

4월 15일 세월호에 오르기전 인호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합니다.
엄마는 친구들과 마지막 추억을 쌓을 수 있는 시간이라며 인호에게 수학여행 잘 다녀오라고 했습니다.

 

다음날
인호와 친구들을 태운 세월호는 진도앞 바다에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인호는 4월 23일에 엄마에게 돌아왔습니다.
운동신경이 좋았던 인호였기에 살아 돌아 올 거라고 믿었지만 인호는 마치 잠든 것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인호는 평택 서호추모공원에 잠들어 있습니다.
엄마는 지금도 인호가 선물해준 시계를 차고 계십니다.

 

“우리 그냥 잠깐 헤어진 거야.
조금만 기다려.
그때는 우리 다시 헤어지지 말자.
친구 많이 사귀고,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아프지 말고. 사랑해.
그리고 미안해.
지켜주지 못해서………….엄마가.”

김진광 – 단원고 2학년 5반

진광이는
아홉살 차이가 나는 쌍둥이인 두누나가 있는 삼남매중에 막내입니다.
누나들의 사랑과 귀여움을 독차지 했고 누나들도 진광이를 마스코트처럼 여기고 사랑했습니다.
진광이는
천성이 여리고 순응하는 아이였다고 합니다.
상대를 배려하고 친구의 눈높이에 자신을 맞추는 것, 친구의 슬픔,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느끼는 독특한 공감 능력을 타고 났고 그걸 키워온 아이였습니다.
가족들이, 친구들이 하라는 것. 청하는 것을 거절할 줄을 몰랐습니다.
친구들이 부르면 언제 어디서든 나타나고 자기 것을 채우기 위해 욕심부리는 일이 없는 아이였으며.신앙심 깊고 누구보다도 엄마를 편하게 해주는 아이였습니다.

 

2학년 5반 14번 김진광의 좌우명은
“갈고 닦은 인격은 무엇보다 강하다”입니다.
좌우명에서 알 수 있듯이 진광이는 또래아이들 보다는 성숙한 아이였습니다
진광이의 좌우명대로 진광이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착하고 배려심 많고 누구보다도 친구를 위할 줄 아는 성숙한 아이였으며
노래와 춤도 잘추고 운동 또한 좋아하며 친구의 고민을 들어주고 상담역활도 해주며 분위기메이커 역활도 진광이 몫이였다합니다.

 

진광이의 꿈은
합기도장 관장이 되는게 꿈이였습니다.
어렸을때부터 태권도와 합기도등 운동을 좋아했고 초등학교 5학년때에는 합기도 전국대회에 출전하여 준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지녔습니다.
국내에서 무술강사로 경험을 쌓은 뒤, 교회나 선교 기관과 협력하면서 외국에 나가 태권도나 합기도를 가르치며 선교 활동을 함께하는 미래를 꿈꿨습니다.

 

친구가 보고 싶은데 교통비가 없어도 고잔동에서 원곡동까지 3~4km를 걸어와서 까지 친구들 얼굴보고 놀고가곤 했다합니다.
인터넷 카페에선 “안산 상담원”으로 통할 정도로 남을 편하게 해주고 친구들의 고민을 들어주던 진광이였기에 학교에서도 교회에서도 인기남인건 어쩜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학급내 역활은 지구과학부장으로 지구과학교과 도우미 역활을 맡았으며 2분단 맨 앞자리 이해봉선생님의 교탁 바로 앞이 진광이 자리였습니다.
짝꿍은 같이 별이 된 김인호 입니다.

 

“내 동생 사랑한다. 무척.
누나도 너 보고 싶어 죽고 싶었는데
아직 살아있다.
엄마.언니.친구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 잘 살다가 갈거야 너한테…. 조금만 기다리고….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말 밖에는 해줄 수 있는게 없어서…
누나 그래도 사는날까지 살아보련다.!”

 

끝으로 절친이 보내준 메모를 옮겨봅니다.

 

*항상 사랑하고 잊지않고 기억하고 있으며 많이 보고 싶다*

 

진광이는 안산 하늘공원에 잠들어 있습니다.

김한별 – 단원고 2학년 5반

한별이는 3.2kg으로 태어 났습니다.
한별이는 위로 형이있는 형제중에 막내입니다.
엄마가 바쁘게 일하러 나가고 할머니와 함께 어린시절을 보냈습니다.
형은 엄마를 찾곤 하였지만 일찍 철이든 한별이는 늘 담담하게 받아들이곤 했답니다.

 

한별이의 중학교때의 꿈은 프로게이머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끼는 물건을 친구에게 양보하고, 엄마가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들어와 한~별~아~하고길게 부르면
엄마에게 다가와 어깨도 주물러 주고 팔 다리도 주물러주면
엄마는 도곤도곤 하루의 피로를 풀곤하는 착하고 효심 많은 아들이기도 했습니다.

 

단원고에 진학하며 체중도 줄이고 공부도하여 대학에 진학하겠다고 목표를 세웠던 한별이었습니다..

 

피할수 없으면 즐겨라~! ”

 

한별이의 목표입니다.
한별이는 노래를 잘해서 친구들이랑 노래방에 가는 걸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 나이 또래 남자 아이답게 게임을 하는 것도 좋아했습니다.

 

또한 친구들이 놀리거나 화를 내도 한별이는 같이 흥분하는 일 없이 언제나 한결같은 너그러운 아이였다고 합니다.

 

수학여행을 떠나기전,
주일이면 엄마와 함께 다니던 교회에 갔던 한별이는 예배가 끝나고 교회에서 밥도 먹고, 구석구석 교회 살림살이도 들여다보고는
목사님께 “그동안 돌봐 주셔서 감사했습니다”라고 인사했답니다.
목사님은 뭔가 이상했지만 철이 드는구나 생각하고 잘 커 줘서 고맙다고 답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게 한별이의 마지막 인사였습니다.

 

“한별아,
너희 교실, 너의 자리에
문득 발걸음이 멈춰졌어.
이것도 인연이겠지?
너희의 땀냄새도 하나 없는
교실에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어
누구를 위한 걸까?
그래 너는 이름처럼
큰 별이 되었을 거야.
별나라에서 나 만나면 모른채 하기 없기!!
그러면 너 듁음 ㅋㅋㅋ”

 

“한별아 안녕,
나는 너를 직접적으로 알고 있지는 않지만 지난해 분향소에서 네 얼굴을 한참동안 본적이 있다.
오늘 교실을 둘러보다가 네 얼굴과 이름이 눈에 띄어 앉았다.
너희들의 안전을 지켜주지 못한 정치인중에 한 명이라 죄스러운 마음이다.
너희들의 밝은 미소와 최후의 순간에도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잠시후에는 나갈 수 있겠지 하는
부모 선생님 세상에 대한 믿음이 산산히 부셔졌지.
그때의 동영상을 잊을 수 없다.
진상규명과 함께 안전한 사회를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마.”

 

한별이는
4월 20일에 가족의 품에 돌아와 안산하늘공원에 잠들어 있습니다.

문중식 – 단원고 2학년 5반

중식이는
네살어린 남동생이 한명있는 형제중에 맏이입니다.
아들바보 아빠와 아빠바보 중식이, 중식이를 비가오나 눈이 오나 학교에 바레다주고 목욕탕에도 함께가서 서로의 등을 밀어주던 부자지간이였습니다.
중식이는 공부보다 먹는것 보다 여자친구보다도 운동을 좋아했습니다.
초등학교적에 태권도 3단과 명예 사범증을 땃고 박지성선수처럼 축구선수가 되고싶어 축구를 좋아했으며 킥복싱을 익혔습니다.
2012년 코리안비트복싱대회 준우승과 2013년국민생활체육인천광역시 한국최강자전 최우수상등을 수상할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뽐냈습니다.
같은반 박홍래와 친구 넷이서 격투기도장을 다니며 절친이였구요.

 

장래의 꿈도
국민대 경호과에 진학하여 경호원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운동후 땀흘리는 것을 좋아했던 중식이답게 계속해서 좋아하는 운동을 할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엄마에게 다정다감하고 동생을 잘 보살폈던 중식이는 부모님과 동생과 함께 건강하고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매년 돌아오는 어버이 날에는 용돈을 모아 부모님께 선물로 감사드리는 효자이기도 했구요.
돌아오는 어버이날에는 어머니께 지갑을 사준다고 약속까지 했었습니다.
엄마와의 약속은 세월호의 침몰과 함께 산산조각나고 말았습니다.

 

중식이는
구명조끼를 착용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보여주며 친구들과 천국여행 중입니다.

박성호 – 단원고 2학년 5반

성호는
우주를 좋아하고 별자리를 찾거나 별 이름 외우는 걸 즐겼고 하늘 사진을 많이 찍었습니다.
또한
역사를 좋아해서 역사는 늘 백점 만점을 받고 싶을 정도로 관심있는 분야에는 성실하게 파고드는 노력파 성호였습니다.
집중력이 강하고 “축구잘하는 박성호”로 불리울 정도로 초등학교 때는 축구선수를 꿈꿀 정도로 축구를 좋아하기도 했습니다.

 

성호에게 엄마는 멘토였습니다.
삶의 태도나 진로 신앙적인 모든면에서 성호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반면 엄마에게 성호는 “젊잖고 예의 바르고 반듯한 아이,
요리를 해도 먹어주던 기쁨을 줬던 아이”
어머니 정혜숙님이 기억하는 성호의 모습입니다.
“엄마 사랑해. 엄마 나중에 효도할께요,”
뽀뽀도 해주고, 안아주고, 조그만 선물이라도 하려고 애썼고, 때론 편지도 써서 건네주던…
잘하지는 못하지만 스스로 만든 요리로 엄마를 기쁘게 해주려 애썼던 효자 아들이었습니다.
따로 귀가하는
두 누나들의 늦은 귀가길에는 한 명, 한 명 버스정류장까지 마중나가 배웅해 오는 착한
누나들의 든든한 보디가드이기도 하였습니다.

 

성호를 따라다니는 수식어에는 “신선” “미륵보살” “아낌없이 주는 나무” “힘이 되어 주는 존재”등이 있을 정도로 타인을 배려하고 친근하게 대하며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존재였습니다.

 

이런 성호도 “아이유빠돌이”였다고 하네요.
아이유 CD를 사 모으고 노래를 들으면서 열렬히 좋아하는 평범한 청소년이기도 했습니다.

 

성호가 초등학교 6학년 시절
미국산 쇠고기 파동이 일어났을 때
“먹거리가지고 장난치는 사람은 참 악한 사람들이다”
“엄마는 그런데 왜 참여 않느냐~!”라며 따져 물었을 정도로 물질적인 것보다는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 또한 많았습니다.

 

사제의 꿈을 키우는 성호가 존경하는 세사람을 써본적이 있습니다.
엄마. 이태석신부님, 노무현전대통령.
첫번째 엄마는
“신앙에 모범이 되고 멘토 역활을 넘치게 해주신 분이어서”
두번째 이태석신부님은
” 전생애를 남을 위해 헌신하는 삶이 존경스러워서”
세번째 노무현전대통령은
” 자기 목숨을 걸어서라도 정의를 증거하는데 주저하지 않는 삶을 살았던 분이어서” 였습니다.
성호는 그중에서 이태석신부님처럼 살고
싶어했습니다.

 

아픈 사람의 벗이 되고, 정의를 위해 앞장서며 성인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삶을 살고자 했던 성호의 꿈은 세월호의 침몰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성호에게는,
여덟명의 중학교 단짝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여덟명이서 단원고에 진학하자고 약속을 했었고 모두 진학하였으며 이번 세월호 사고로 여덟명 모두 희생되는 안타까운 비극을 맞았습니다.

 

“4107083”

 

하늘공원에 잠들어 있는 봉안함 번호입니다.
성호에게 메겨진 이세상에서의 마지막 번호이지요..
사제의 길을 걷고자 했던 성호,
하느님곁에서 영원한 사제의 길을 걷는 성호를 상상해봅니다.

박준민 – 단원고 2학년 5반

“엄마에게 그리도 다정다감했던 아들, 외출할 땐 팔짱을 끼라며 팔을 내어주던 애인 같은 아들,
나가 있을 땐 항상 문자와 전화로 엄마를 안심시키더니 마지막까지 아무 일 없을 거라며 엄마에게 나오겠다고 전화했던 게
너와의 마지막이 될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

 

“모든 걸 다 줄 만큼 사랑한 금쪽같은 내 새끼”

 

이 말은
준민이가 가장 좋아하는 말입니다.
준민이는 바리스타가 꿈이었습니다.
2013년 여름방학때 엄마와 함께 카페를 다니며 팥빙수를 먹다가 우연히 이런 꿈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해 9월부터 바리스타 학원에 다니기 시작하더니 2014년 1월에 바리스타 3급자격증을 땄습니다.
집에 커피 뽑는 기계를 사다 놓고 엄마에게 항상 커피를 만들어주곤 했던 준민이는
수학여행에서 돌아와 5월12일에는 바리스타 2급 자격시험을 볼 예정이었습니다

 

4월 16일 오전 9시 6분 세월호가 점점 기울자 준민이는 휴대전화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자꾸만 끊겼습니다.
9시40분.
가까스로 준민이는 엄마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엄마에게 건 스물여섯번째 전화였습니다.
준민이는 엄마에게 무덤덤하게 “나.구명조끼 입고 있고 곧 배 밖으로 나갈 거야” 라며 엄마를 안심시켰습니다.
하지만 준민이는 4월 23일이 돼서야 사고당일 엄마와 통화했던 그시간인 9시40분에 엄마 품에 돌아왔습니다.

 

어릴적 연기학원에 다니여 EBS어린이 프로그렘에 출연도 하고 (노란손수건)드라마에도 출연하고
우유를 말아 먹는 씨리얼 광고도 찍었던 준민이,
엄마는 아침마다 준민이와 동생을 뽀뽀로 깨웠습니다.
뽀뽀 한 번 할 때마다 준민이는 아주 조금씩 눈을 떴습니다.
뽀뽀 의식을 10분 이상이나 받은 다음에야 준민이는 눈을 반짝이며 일어 났습니다.
엄마는 오늘도 아침의식을 변함없이 합니다.
순서가 동생이 먼저로 바뀌었을 뿐, 동생이 일어나면 준민이 방으로 가 책상 위에 세워놓은 준민이 사진을 보며
“준민아 잘 잤어?”하고 묻습니다.

 

세상에서 엄마가 최고라고 엄마 밖에 모르던 준민이를 보낸 엄마는 매일 밤 준민이가 잠들 던 침대에서
준민이의 교복 재킷을 덮고 잠이 들곤 합니다.
준민이의 여동생 또한 오빠가 잠든 경기도 화성 효원추모공원에 갈 때마다 “사랑한다”는 편지를 써두고 온다고 합니다.

박진리 – 단원고 2학년 5반

박진리 학생입니다.

 

진리에 대해서는 알려진 이야기가 하나도 없습니다. 얼마 전 단원고 약전이 출간되었을 때 하루 얻어 읽을 기회가 있어
사연을 잘 알지 못했던 학생들을 중심으로 열심히 찾아봤는데, 진리는 심지어 약전에 이름도 실려있지 않습니다.

 

약전은 작업에 참가하신 작가분들이 가족분들 허락을 얻고 인터뷰해서 집필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약전에도 없다면 가족분들 의향이 아주 분명한 것입니다. 진리가 어떤 아이였고,
무엇을 좋아했고, 어떤 미래를 꿈꾸었는지,
가족분들께서 가슴 속에 묻어두고 마음으로만 기억하고 간직하시겠습니다.

박홍래 – 단원고 2학년 5반

굉장히 넓고 넓은 바다에 오색 찬란한 물고기들이 노닐고 있었던 아빠의 태몽으로 세상에 나온 홍래는
위로 형이 있는 형제중에 막내입니다,
명랑쾌활의 대명사라고 할 만큼 사교성도 좋았고 성격도 활발했습니다.
또한 레고를 할때는 천둥번개가 쳐도 모를 만큼 놀라울 정도의 집중력을 보이곤 했습니다.

 

“뜨거운 형제애”
엄마의 껌딱지 홍래는
연년생인 형과는 학교가는 시간을 빼고는 항상 운동을 같이 가고, 같이 잠자고, 지방에 있는 아빠가 못 올라오실 때는
전라도 광주까지 같이 다녀오는 등 마치 쌍둥이처럼 지냈습니다.
엄마에게는 옆에서 항상 웃으며 조잘대며 딸 노릇까지 해주던 다정한 아들이기도 했습니다.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이나 생일때면 직접케이크를 만들고 작은 선물을 하거나 깜짝파티를 해주던 의좋은 형제이기도 했습니다.

 

홍래는 자그마한 체구에 귀여운 외모를 자랑합니다.
학교에서도 봉사동아리 TOP에서 활동할 정도로 어른을 공경하고 예의를 아는 홍래였습니다.
그런 홍래의 꿈은 의외로 이종격투기선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약속
“오늘 나는 서두원이 아니라 박홍래였습니다”
2014년 5월31일.
원주치악체육관에서 경기 시작 15초만에 상대선수를 KO시킨 서두원선수는경기가 끝나자
홍래형을 링위로 불러 끌어 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외쳤습니다.
“나, 약속지켰다”고….
홍래는 형과 친구들과 함께 체육관을 다녔습니다.
특히 서두원선수를 좋아해 자신의 방에 사진도 여러장 붙여놨다고 합니다.
홍래와 형은 수학여행을 다녀와서 6월에 이종격투기대회에 참가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홍래는 세월호 사고 8일째인 4월 23일에야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배가 침몰하기 전
“형, 무섭다…살려줘”라고 보낸 카카오톡 메시지가 홍래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동생의 장례를 마친 형래는 동생에게 마지막 선물을 하려고 서두원선수 소속사에 전화를 걸었고
사연을 들은 서두원선수는 5월31일 경기를 이기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켰던 것입니다.

 

세월호가 침몰하기전 홍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구명조끼를 입고 구조대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였으나
8일 만에 가족품으로 돌아온 홍래는 구명조끼를 입고 있지 않았습니다.
착하고 친구들을 좋아했던 홍래였기에 누군가에게 자신이 입고 있던 구명조끼를 건네지 않았겠느냐고 생각합니다.

 

2015년 6월에 홍래형은 동생을 지켜주지 못한 이 나라를 떠나 영국에서 홀로서기에 나섰습니다.
그의 어깨에는 동생 홍래를 그리워하는 글귀와 홍래생일이 세겨져 있습니다.
매월 16일이면 런던에서 현지인들과 교민들과 함께 홍래와 친구들을 위해 피켓을 들며 안타까운 형제애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홍래가족은 세월호참사가 일어나기전 이사계획을 재작년에 실행했습니다.
홍래는 미리 이사할 집을 한 번 구경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사를 마치고 며칠이 지났을까 저녁에 새 한마리가 아파트 베란다 창들에 날아와 앉았답니다.
엄마가 거실을 여러 번 지나갔는데도 간간히 날개만 푸드덕거릴 뿐 가까이 다가가도 날아가지 않더랍니다.
그렇게 오후 4시 무렵에 날아온 새는 다음날 새벽 3시까지 형이 있는 방을 바라보며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새는 마치 이렇게 묻는 것 같았답니다.

 

“형, 잘있어?”
“엄마 잘 지내?”
“아빠는 회사 갔어?”

 

홍래생일을 하루 앞둔 2016년 홍래가족이 이사한 광주집을 찾았습니다.
주인이 없는 홍래방은 마치 홍래가 있는것처럼 온기와 체온이 느껴졌습니다.
세월호참사로 자식을 잃은 부모님들은 모두가 이렇듯 아직 자식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계십니다.

 

홍래는 경기도 화성효원추모공원에 잠들어 있습니다.

서동진 – 단원고 2학년 5반

동진이는 외동아들입니다.
외가에서도 첫 손주 첫 조카였고 친가에서도 첫 손주 첫 조카여서 귀여움과 사랑을 독차지 했습니다.
버스커버스커와 버즈의 노래처럼 밴드의 노래를 즐겨불렀고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실용음악학원에 다니며 기타도 배우고 보컬수업도 들었습니다.

 

동진이의 꿈은
싱어송라이터가 되는 것 이었습니다.
기타도 치면서 노래도 부르고 작곡도 하고 춤도 추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음악에 관한것들은 무엇이든 좋아하는 그런 아이였습니다.
학교에서도 사물놀이 동아리에서 북을 쳤고
학교수업이 끝나면 두군데의 아르바이트를 거쳐 댄스학원과 보컬학원으로 직행할 정도로 자신의 꿈을 향해 열정적으로 달리던 아이였습니다.

 

아버지를 닮아 훨씬한 키에 장난기 많고 다정다감하며 또 어느때는 마음을 움직이는 위로를 건내고, 세심하게 주변사람들을 챙겼기에 동진이 주변에는 늘 웃음과 친구들이 넘쳐 났습니다.

 

수학여행을 떠나는 날 2014년 4월 15일 아침,
동진이는 학교가는 길에
자신이 직접 만든 2단 도시락을 싸들고
이 소녀의 집 앞에 찾아왔습니다
소녀는 동진이에게 수학여행에서 돌아오면 “그럼 난, 5단 도시락을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하지만 끝내 동진이는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4월 27일에야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 동진이.
이 소녀와 어머니는 동진이 장례식이 치러진 고대병원 장례식장에 5단 도시락을 싸가며 눈물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장례식후,
동진이에게 이 소녀는 동네에 피어난 봄꽃을 꺾어 동진이집 우편함에 매일 놓아두는 것으로 동진이를 맞이해야만 했습니다.
안산 와동의 모든 봄꽃들이 이 소녀와 친구들의 마음으로 옮겨져 동진이네 우편함을 가득 채웠습니다.
소녀의 봄, 엄마의 봄, 안산의 봄은 슬픔의 봄으로, 꽃들은 슬픔을 담고 꽃 피울 수 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주변의 많은 이들과 한 소녀, 친구들과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동진이는 지금은 하늘공원에 잠들어 있습니다.

오준영 – 단원고 2학년 5반

준영이는
여동생이 하나있는 남매중에 맏이입니다.
학교 갈 때면 엄마에게 하트를 날리고,
가족 반지를 맞추고, 야구복도 맞춰 입자던 살갑고 애교 많은 아들이었습니다.
일하는 엄마한테 이모티콘 보내며 힘내라고 해주고, 청소기도 돌리고, 교복도 빨아놓으며 집안일도 잘 거들었습니다.
여동생에게는 라면 대신 몸에 좋은 달걀볶음밥을 해주고, 늘 안방 엄마 곁에서 자고 싶어 하는, 철든 오빠와 어린 아들의 모습이 함께 있던 아이였습니다.

 

준영이는 야구를 좋아했습니다.
안산에서 유명한 “강소야”(강한 소년들의 야구) 에 들어가서 활약했고, 베니본즈를 좋아해 등번호 25번을 달았습니다.

 

준영이네 부엌에는
냄비장갑이 하나 있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가기전 음식을 하다가 손을 데인 엄마를 위해 자신이 직접 바느질을 해서 만들어준 것입니다.
이처럼 엄마에게는 큰 딸 같은 준영이었고
아빠와 함께 목욕탕가는 걸 제일 신나했던 가족을 사랑하는 준영이었습니다.

 

아빠는 집을 지키는 사람이라 “지킴 빠곰”,
엄마는 집안을 충전한다고 “충전 마곰”,
동생은 집안의 희망이라고 “희망 아곰”,
자신은 집안의 꿈이라며 “꿈돌 곰돌”이라고 이름지었던 준영입니다.

 

준영이의 꿈은
세무공무원이 되어서 부정한 일을 바로잡는 일을 하고 싶어했습니다.

 

준영이는 매일 밤 10시 야간자율학습을 마치면 800m나 떨어진 안산세무서 앞 버스정류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세무서 근처에서 일하는 엄마와 함께 집에 돌아가기 위해서였습니다. 매일 밤 10시 20분 준영이와 엄마는 101번 버스를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준영이는 자기 방이 있었지만 늘 안방에서 엄마와 함께 잠을 잤습니다. “네 방에 가서 자라”고 하면, “군대 가기 전까지만 “엄마곁에서 잘게”라고 했다고합니다.

 

준영이는
세월호 침몰사고가 나고 8일째인 자신의 생일날인 4월 23일 차가운 바다속에서 올라왔습니다.
시간마저 태어났던 그 시간에….
한번은 엄마 배안의 태를 끊고,
또 한번은 저주받은 배를 뚫고….

이석준 – 단원고 2학년 5반

어려서부터 만화를 좋아했던 석준이는 한글을 만화를 보면서 깨우쳤고 일본어도 일본만화를 보면서 터득했습니다.
어렸을적 경찰관이 되고 싶었던 장래희망이 관광가이드로 바뀐것도 만화를 통해 일본어를 독학한 뒤였습니다.
어려서부터 배운 검도실력 또한 수준급 실력이였습니다.
듬직한 덩치에 동생 석훈이와 함께 걸을때면 든든한 보디가드 두 명을 옆에두고 걷는 느낌이였으며 세상부러울게 없는 아빠였다고 합니다.
2014년말 사랑하는 석준이를 보내고 보고싶은 마음을 견디지 못한 아빠는 예전 석준이 휴대폰 번호로 카톡을 보냈습니다.
“아빠가 죄가 많아 석준이가 잘못됐다고, 할머니가 이 일을 아시면 어떻하냐고, 아빠가 늙어 죽어서 가면 아빠를 잊어버리면 안된다” 라고 답을 받을 수 없는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답장이 날라왔습니다. 새로 그 번호를 갖고있던 사용자가
“잘지내고 있으니 괜찮으니 천천히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다오세요”라는 답장을 석준이 대신에 보내주었습니다.
이 사연을 쓰레기 언론은 실명을 거론하며 기사화 했었구요.

 

석준이는 효자아들 이였습니다.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돈으로 바깥일을 하는 아빠에게 겨울에 손 시려울까봐 스마트폰용 장갑을 선물하기도 하였고 남동생을 살뜰히 챙기기도 하였습니다.
석준이 집에는 2014년 4월 10일 수학여행을 떠나기전에 구매한후 한번도 사용하지 않은 자전거가 놓여있습니다.

 

오토바이사고로 걸음이 불편한 아버지의 만류에도 자신이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돈과 아버지에게 빌린 돈으로 안전모와 함께 구매하였으나 한번도 타보지 못한채 주인을 잃어버렸습니다.
죄인이라는 아빠는 아들의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투쟁의 현장에 늘 가까이 있습니다.
생업이던 탱크로리 차량을 매각하고 이동이 용이한 택시를 구매하여 싸우고 있습니다.

 

청와대에서, 광화문에서, 진도에서, 정읍에서. 울산에서, 전국 어디에서든 석준이의 진실을 찾고자 절룩이는 발걸음을 힘들게 옮기고 계십니다.
간담회에서 울분을 토하시고, 광주 법정에서 분노를 표하시고 시위의 맨 앞자락에 서 계십니다.
운동을 잘하고 힘도 장사여서 꼭 살아서 돌아 올 거라던 석준이는 아버지의 기다림과는 달리,
“유학가 있는데 명절 때 한번도 들어오지 않는다”라는 할머니의 서운함과는 달리
지금 평택서호추모공원에 함께 수학여행을 떠났던 친구들과 고이 잠들어 있습니다.

이진환 – 단원고 2학년 5반

진환이는
세살어린 여동생이 있는 남매중 오빠입니다.
“진환” “나라를 빛내라”라는 뜻의 이름처럼 진환이는 늘 주위사람을 밝게 웃게하는 아이였습니다.
특유의 밝고 온화한 성품에 맑은 에너지를 지녔고 곁에있는 사람은 늘 웃고, 미소지으며 행복했답니다.

 

진환이의 첫번째 꿈은
축구선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초등학교때는 선수로 활약했으며 박지성선수처럼 멀티플레이어가 되고 싶어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안산에는 전문 축구부가 있는 상급학교가 없어서 축구선수의 꿈을 접어야만 했습니다.
중학교에 진학하여 체육선생님을 만나며 선생님을 멘토로 삼아 ” 체육선생님” 이 되겠다는 꿈을 키웠습니다.

 

“엄마, 나 아르바이트 해 보고 싶어”

 

체육선생님이 되고픈 꿈을 안고 단원고에 진학후 첫번째 겨울방학때 진환이는 떡볶이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였습니다.
진환이는 특유의 성실함과 온화함으로 첫 사회생활을 훌륭히 해냈습니다.
수학여행을 가기전까지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 100여만원을 엄마에게 내밀며 “여기 내 첫 월급~! 엄마 사고 싶은 것 사세요~”라고 내밀었지만
엄마는 계획적으로 돈쓰는 방법을 알려주기위해 현금카드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진환이는 이 돈으로 아빠와 동생에게 선물을 사 주었고 수학여행경비도 직접냈습니다.

 

단원고 최고의 인기남.

 

진환이는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도, 또한 여학생선.후배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습니다.
배려심 많고, 매너 좋고, 마음이 깊고, 감성 또한 풍부했던 진환이는 따뜻한 마음으로도 친구들에게 감동을 주기도 했습니다.
차비가 없는 친구에게 차비를 빌려주고 정작 자신은 걸어서 오고 따돌림 당하는 친구들을 지나치지 못하고 꼭 챙겨주는 아이였습니다.

 

동생에게는 때로 친구같고, 때로 아빠같은 오빠였으며, 항상 동생을 이해하고 안아주는 따뜻한 오빠였다고 합니다.
엄마에게는 든든한 맏아들이었으며, 아빠와 축구를 함께하며 이혼때문에 혼자가 된 아빠의 마음을 쓰다듬어 주기도 했던 어른스러운 진환이 이기도 했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오전 침몰하는 세월호 안에서
“구명조끼 입고 있어. 선생님이 대기하라고 해서 대기하는 중이야. 엄마 다른 친구들도 통화해야 된데….”
라며 친구의 전화를 빌려서 마지막으로 엄마와 통화한 진환이는 사고후 7일만인 4월 22일 안산으로 돌아와 하늘공원에 잠들었습니다.
진환이의 짝꿍은 이석준입니다.

 

진환이는

 

사고가 나기 일주일전 여동생과 엄마의 손을 잡고 여의도 벚꽃놀이를 다녀왔습니다.
아빠로서, 오빠로서, 아들로서 두여성을 에스코트하면서….
벚꽃길을 걸으며 사진을 찍고 세식구는 행복한 순간을 마음에 담았습니다.
기분이 한껏 좋아진 진환이는 거리의 커리케쳐화가에게 자신을 그려 달라고 했습니다.
그날…
진환이는 유독 행복해 보였습니다….

이창현 – 단원고 2학년 5반

창현이는
누나가 있는 남매중에 막내입니다.
운동을 좋아하고 활동적인 아빠의 성격을 빼어닮은 창현이는 중학교 2학년때까지 800m 달리기 선수를 할만큼 운동을 좋아했습니다.

 

김치찌개와 콩나물 국밥을 좋아하고 좋아하는 고기가 나오면 말처럼 “히이잉” 기분 좋은 소리를 내곤했던 창현이.
마른 몸이지만 축구와 달리기를 좋아했던 날쌘돌이 창현이는 국밥집 사장이 되는 것이
꿈이였습니다.

 

창현이는 정많고 밝은 성격에 의리있는 아이였습니다.
흔히들 유행하는 말로 “츤데레”라고도 불리었답니다.
또한 여행을 좋아해서 매년 친구들과 함께 도보여행을 다녔다고 합니다.
수학여행을 갈때도 창현이는 생전처음 가보는 제주도여행에 한껏 들떠있었습니다.

 

창현이는 중학교때 사춘기를 호되게 겪었습니다. 어머님이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고 걱정도 많이 하셨습니다.
창현이가 친구들이 힘들어하면 다독여주고 나쁜길로 빠지지 않게 붙잡아 주는 아이였다는 걸 어머니는 창현이가 떠나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창현이 부모님은 창현이가 왜 그렇게 갑자기 떠나야했는지 대체 무슨일이 있었는지 알기위해
국회와 광화문은 물론 어머님은 삭발도 하셨고 지금도 청운동과 홍대앞에서 또 전국어디든지 달려가시며 창현이와 친구들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고 계십니다.
창현이의 짝꿍은 인태범이며 효원추모공원에 잠들어있습니다.

이홍승 – 단원고 2학년 5반

“아빠, 동생과 함께 엄마는 내가 지킨다”

 

홍승이는
남동생이 하나있는 형제중에서 장남입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힘들때마다 용돈을 모아 옷을 사는 일로 스트레스를 풀어내고, 독특한 디자인의 옷을 고르고 친구들의 생일케이크를 직접 만들어 선물하던 홍승이.
작은 눈 때문에 친구, 선배로부터 오해 아닌 오해를 받자 안경알 없는 짙은색 뿔태 안경을 착용했던 홍승이였습니다.

 

홍승이의
장래희망은 “미용사”였습니다.
꿈을 이루기위해 9개월간 미용학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이홍승 학생에 대해서는 알려진 이야기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홍승이는 친구들한테 많이 사랑받는 아이였던 것 같습니다.
학교에 있는 홍승이 책상에는 어렸을 때부터 알던 친구들이 홍승이를 그리워하며 남긴 쪽지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친구들의 추억 속에서 홍승이는 이름 때문에 재미있는 별명이 많았습니다.
친구들은 홍승이가 아기처럼 징징댄다고 이름과 비슷한 ‘콩순’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친구들이 남긴 쪽지에서 홍승이 어렸을 때 부르던 별명은 ‘송충이’였습니다. 홍승이도 지지 않고, 자기를 ‘송충이’라고 놀리는 친구를 ‘애벌레’라고 부르며 놀렸습니다.

 

홍승이는 가수 나비 를 좋아했습니다. 홍승이가 나비의 ‘잘 된 일이야’를 부르던 모습, 같이 집 앞 놀이터에서 놀던 추억들이 아직도 기억난다고,
보고 싶다고, 친구들은 쪽지를 써서 홍승이 책상에 남겼습니다. 그리고 같은 5반 조성원 학생의 동생도,
‘우리 오빠 친구해줘서 고마워요’라고 홍승이 책상에 편지를 남겼습니다.

 

홍승이가
안경알 없이 끼던 뿔태안경은
홍승이와 함께 안산 하늘공원에 잠들어 있습니다.

인태범 – 단원고 2학년 5반

태범이는
누나가 둘이 있는 삼남매의 막내였습니다.
애교많고 붙임성좋고. 글쓰기와 그림그리기를 좋아하던 다섯식구의 막내였으며 사촌들과 친척들의 중심에는 늘 태범이가 있었습니다.
누나에게 10,000자 편지를 쓸 정도로 다정한 동생이었고 누나가 퇴근할때 버스정류장으로 마중을 나가고 화랑유원지 운동을 할때면 뒤따르며 애교섞인 목소리로 응원을 해주던 귀여운 막내이기도 했습니다.

 

태범이는
같은 반 친구인 창현이와 친했고 가끔씩 창현이가 태범이 집에 놀러오곤 하였답니다.

 

태범이 아버님의
아들 사랑은 남달랐다고 합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 났을 때 태범이 부모님은 진도로 달려가셨습니다.
태범이도 사고후 닷새만에 가족의 품에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태범이의 모습이 예전 같지 않는 것을 보고 아버님은 큰 충격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식사도 제대로 못 하시고
“아들 없이 사는 것이 너무 허망하다. 이래 살아서 뭐하느냐” 며 낙담을 많이 하셨다고 합니다.

 

입맛도 없고 밥을 먹어도 소화도 안되어 고생하셨지만 스트레스 때문일거라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나 먹을 것을 먹어도 소용이 없어서 참사가 일어난지 석 달만에 큰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습니다.
진단은 담도암 말기였습니다.
아버님은 4월초 (세월호 참사전)모 대학병원에서 어머니와 함께 건강검진을 받았고 당시만해도 아무런 증상이 없었다고 합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나서 다른 모든 부모님들이 아이를 찾느라 정신이 없어서, 그후엔 진상규명을 나서면서 제대로 건강을 챙기지 못했습니다.
세월호 참사만 터지지 않았어도 미리 검사하고 일찍 발견해서 최악을 막을 수 있었던 부분입니다.
태범이 아버님은 태범이 생일이 지나고 2주후인 10월 26일에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 태범이 곁으로 가셨습니다.

 

돌아가실때
“태범이다” 하고 환하게 웃으시며 눈 감으셨습니다.

 

태범이와 아버지 인병선님은 경기도 평택 서호추모공원에 나란히 한 유골함에 잠들어 계십니다.

정이삭 – 단원고 2학년 5반

“5대독자”
단 하나뿐인 아들, 넉넉하지 못한 집안 때문에 갖고 싶은것, 하고싶은 일들을 풍요롭게 해주지 못한 것을 이삭이 아버님은 아직도 미안하고 안타깝다고 말씀하십니다.
흔한 사춘기 한번 겪지않고 학교도 열씸히 다니며 착하고 좋은 아이였던 것 또한 참 고맙게 생각하고 계시답니다.

 

이삭이는 효자 아들이였습니다.
어머님이 편찮으셔서 집안일을 잘 챙기지 못 하였는데 투정 한번 하는 일 없이 어머님을 잘 돌봐 드렸다고 합니다.
어머님을 자전거위에 태우고 다니면서도 항상 웃는 얼굴이였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이삭이의 꿈은 어머님처럼 생활이 편하지 않는 분들을 돕는 사회복지사가 되는게 꿈 이였습니다.
“후회하지 말자”라는 실천적 좌우명을 가지고 학교와 교회를 열씸히 다니며 꿈을 키우던 이삭이도 세월호의 비극을 피해가지 못했습니다.
5대독자의 소박한 꿈을 실었던 세월호는 4월 16일 침몰하였고 이삭이는 4월20일에 돌아와 안산 하늘공원에 잠들어 있습니다.

조성원 – 단원고 2학년 5반

To 조성원오빠
바보, 똥꾸멍, 오징어 오빠야….
오빠 차가운거 겁나 싫어 하잖아
맨날 나한테 보일러 틀어 달라 하잖아….
이젠, 앞으론 그러지 말고 따뜻하게 손난로 써야돼.
오빤 특별히 두개니까
혼자 다 써야된다.
성원이동생오징어 아름.

 

조성원.
성원이의 꿈은
역사선생님이 되는 것 이였습니다.
성원이는 담임선생님이신 #고이해봉선생님을 존경했습니다.
중앙대학교에 진학하여 이해봉선생님처럼 역사선생님의 길을 걷고자 했습니다.

 

성원이는
세살 어린 여동생과 열 살어린 남동생이 있는 삼남매의 맏이입니다.
활달한 성격에 친구도 많고 좋아하는 선후배도 많은 인기남 입니다.
만화영화 둘리에 나오는 케릭터 마이콜과 피부와 머리 스타일이 닮았다하여 친구들은 “마이콜성원” 이라고도 부르기도 했다고합니다.

 

동생들도 잘챙겨주었던 성원이는 특히 꼬마 막둥이를 많이 챙겼고 막둥이도 형을 잘 따랐다고합니다.
또 엄마와도 너무 친해서 비밀도 없었고 대화도 많이 나누었다고 합니다.
늘 엄마곁에 껌딱지처럼 언제나 붙어다녔던
성원이를 어머님은 “마마보이”로 기억하고 계십니다.

 

세월호가 인천항을 출항하기 전날인 4월15일 저녁에 성원이는 어머니와 통화를 했습니다.
어머니는 안개가 많이 끼고 날씨가 좋지않아 출항이 미뤄졌다는 말에 어쩐지 불안하다고 하였으나 성원이는 괞찮다고 어머니를 안심시켰고 그렇게 대화를 마쳤습니다.
그것이 어머니가 들은 성원이의 마지막 목소리였습니다.

 

끝까지 지켜주겠다는 막내 록이도 지켜주지 못한채, 친구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엄마, 누구보다 믿어 주고 지지해 주는 엄마, 친구 같은 엄마를 남겨 두고 성원이는 우리들곁을 떠났습니다.

천인호 – 단원고 2학년 5반

“인호야 누나야”
잘 지내는 건지 너무 보고 싶다.
어디 아프지 말고 겨울이 왔는데 감기도 조심하고. 많이 춥다.
잘 지내고 우리 또보자.
다음 생에도 누나 동생해주라.
그땐 더 잘해줄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미안해. 사랑한다 내 동생.
진짜 너무 보고 싶다. 아프지마 그곳에선.
사랑해.

 

“깝쭉이 인호”
인호는 부모님과 다섯살, 네살터울의 두명의 누나가 있는 집안의 막둥이 입니다.
세상에 하나 뿐인 아들. 하나뿐인 남동생.

 

가느다란 눈매. 웃으면 초승달이 되는 눈.
인호는 사랑을 주면 받으면 받은 것 이상으로 돌려주는 그런 아이였습니다.
엄마와 두누나는 인호를 꾸며주기를 좋아했습니다.

 

학급에서는 각종회비 및 월드비젼을 모금하는 총무를 맡았고 학교에서는 제과 제빵동아리에서 활동했습니다.
작고 귀여운 모습에 주변에 친구도 많았고 선배들로부터 귀여움과 사랑도 많이 받았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때 현장으로 달려가신 인호 부모님은 경악하셨습니다.
아이들이 배안에 있는데 해경은 장비가 없다. 날씨가 나쁘다며 배안에는 제대로 들어가지 않고 수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언론여서는 “수색이 성공적이다” “벌써 식당칸에 들어갔다”등 앞질러 보도 했습니다.
인호 어머님께서는 이런 현실을 알리기위해 인터뷰를 하셨지만
인터뷰는 유튜브를 통해서만 보도 되었고 주요 언론에서는 여전히 오보만 쏟아냈습니다.

 

일반 국민들이 주요언론에서 발표한 사실에만 귀기울이고 있을때
인호와 이해봉담임선생님 , 그리고 짝꿍 이홍승등 친구들은 주검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인호는 안산 하늘공원에 잠들어 있습니다.

최남혁 – 단원고 2학년 5반

“사랑하는 우리 아들 잘있지?
날씨가 너무 덥다.
네가있는 그곳은 어때?
이 여름이 지나고 나면 가을이 오겠지.
그럼우리 아들 생일인데
니가 없는 생일 엄마는 너무 아프다.
마음이 아프다
해맑게 웃는 아들 모습이 그립다.
잘 지내고 또 올게. 사랑해 혁아.”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검사의 꿈》
남혁이는 중3 여동생이 있는 맏아들입니다.
남혁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어머니도 직장생활을 시작하였는데 남혁이는 자신도 보살핌을
받아야할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여동생을 잘 돌봤다고 합니다.
어린 여동생이 유치원에 다녀오면 살뜰하게 챙겨줬고 공부도 가르쳐주던 살뜰한 오빠였습니다.

 

​남혁이는 초등학교 때까지도 활달하고 게임을 즐겨하며 친구들과 놀러다니는 것도 좋아했는데
사춘기를 겪고나서는 성격이 많이 변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남혁이가 사춘기때 어머니 마음쓰시게 했던 것이 미안했던 마음에 그랬던것같다고 하셨습니다.
사춘기이후 남혁이는 시간관리도 철저하게하고
잔소리 할 일도 없이 모든 일을 스스로 알아서 잘했고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남혁이의 꿈은
고려대학교에 입학하여 검사가 되는 것이였습니다.
하지만 남혁이의 꿈과 미래를 세월호는 침몰시켜 버렸고,
대한민국은 304명의 영혼을 집어 삼켜 버렸습니다.

 

남혁이는 화성효원추모공원에 잠들어 있습니다.

 

“요즘 오빠가 더 보고 싶어져”
항상 보고 싶었지만 5일뒤면 오빠 동생 생일이야.
동생 생일날에 꼭 꿈에 나와서 축하해 줘야해!
나중에 만나서 그때 사줬던 토스트 사주는거다~♡
난 오빠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사줄테니,
언제나 사이 좋은 남매로 지내자.사랑해.♡

최민석 – 단원고 2학년 5반

민석이는 형이 한명있는 형제중에 막내입니다.
민석이는 반듯한 아이였습니다.
어찌나 고지식한지 횡단보도가 아니면 절대 길을 건너지 않았고 같이 길을 가는 엄마가 차가 오지 않으니
그냥 건너도 괜찮다 말해도 그럼 횡단보도 왜 만들었겠냐며 오히려 핀잔을 주는 그런 아이였습니다.
어릴적 다른 친구들이 장난감을 찾을때 책을 찾을 정도여서 상식이 풍부했고 뭐든 물어보면 척척 대답하는 만물박사였습니다.

 

효율성을 중시하고 학생은 학생답게 입어야 한다며 옷은 검정색 아니면 흰색등 단색 계열만 입고 다녔습니다.

 

민석이의 꿈은
경찰관이 되는 것이였습니다.
병역문제가 해결돼야 경찰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고 가산점을 받을 수 있는 의경을 가겠다고 벌써부터 진로를 정해놓은 상태였습니다.
민석이를 아는 사람들은 분명히 훌륭한 경찰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민석이 자리에는 책이 한권 놓여져있습니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민석이는 게임정보 사이트 “루리웹”의 이용자입니다.
닉네임 “하루카씨”로 활동했습니다.
민석이가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인 아이돌마스터의 주인공에 한 명인 *하루카*라는 이름을 닉네임으로 삼아서
루리웹이라는 인터넷 애니메이션과 게임전문 커뮤니티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습니다.
수학여행을 가기 전날에도 민석이는커뮤니티에 “만화를 볼 시간도 없는데 3박 4일간 제주도에 묶이게 됐다”며 글을 올렸습니다.

 

(“충사….죠죠…러브라이브….다음주까지 기다려야 겨우 볼 수 있겠네요. 어우 뭔 제주도를 3박4일로 가는지…”( 2014.4.15. 00:52:52) )

 

참사가 일어난뒤 민석이가 쓴글에는 민석이를 걱정하는 댓글들이 수백개씩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돌아와” “새글 빨리써라” “네가 좋아하는 작품,3부 엔딩까지 나왔다.” “댓글 좀 달아봐” “사랑한다”
“부탁합니다, 제발 살아 있어주세요”
“그리고 사람들이 한마음 한 뜻으로 기다리고 있어요.
살아있다면 한 마디만…..”

 

4일만에 돌아온 민석이 장례가 치러지던 4월24일 같은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던 분이 민석이가 마지막으로 쓴 글에
보고싶다고 했던 애니메이션과 최신작품을 모두 구비하여 휴대용 게임기와 함께 가족들에게 전달했습니다.
민석이가 쓴 글에는 최대한인 3,000개의 댓글이 달렸고, 회원들은 민석이가 이전에 쓴글들을 찾아서 추모의 댓글을 쓰곤 했습니다.
민석이는 20일에 가족품에 돌아와 지금은 화성효원추모공원에 이해봉 담임선생님과 나란히 잠들어 있습니다.

 

마지막글을 남기고 엄마에게 선물할 감귤초콜릿을 많이 사 오겠다는 꿈을 가지고 떠난 수학여행은 끝내 비극으로 끝나 버렸습니다.